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약 250㎞ 떨어진 도시 로스팔로스. 이곳에서 영암인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지난 8월 22일 미암면에 거주하고 있는 박정환(38)씨는 바쁜 영농 철을 끝내자마자 바쁘게 짐을 꾸렸다. 동티모르를 가기 위함이었다. 출발에 앞서 박 씨는 여행용 가방에 자신이 쓸 간단한 옷가지와 동티모르에 있는 옛 친구들을 위해 구급약품과 헌 신발 10여 컬레, 손톱 깎기 등을 가방에 가득 채웠다.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물건들이었지만 동티모르 친구들에게는 귀중한 것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준비 하는데만 약 150여만원 상당의 비용이 소요됐다. 여기에 삼호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정현숙씨도 박 씨에게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박 씨가 이처럼 이역말리 떨어진 동티모르의 이방인들을 위해 짐을 꾸리게 된 데에는 15년 전 아련한 추억으로부터 시발됐다. 지난 2000년 박 씨는 하사관으로 상록수부대에 자원해 동티모르에서 파견근무를 했던 인연이 시초였다. 비록 그 다음해 전역을 하면서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박 씨에게는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으로 가슴 깊은 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막대한 경비도 그렇고 한달여의 시간을 빼기도 어려워 하루 이틀을 미루다보니 벌써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미루면 앞으로도 이러한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박 씨는 경북 성주의 아는 지인과 함께 계획을 짜면서 차근차근 준비했다.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 인천에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인도네시아 발리를 거쳐 동티모르까지 약 16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예정했던 동티모르에 도착한 박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반세기 동안 계속된 무장투쟁과 유혈 참극으로 황폐화 되었던 15년 전의 모습이 그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굳이 바뀐 게 있다면 전기하나만 들어왔을 뿐 15년 전과 똑같이 아무것도 없고 위험한 곳이었다. 파병 당시 인연을 맺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동티모르 국방부나 경찰청 등 곳곳을 관광하는 기회도 있었지만 이내 박 씨는 자신이 파병됐던 도시인 로스팔로스로 이동했다.
박 씨가 도착하자 현지민들의 반응은 환영일색이었다. 이유인 즉슨 동티모르 독립 이후,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 우리나라 상록수부대가 로스팔로스 지역에 주둔하며 국가 재건에 이바지해 줬기 때문이었다.
현지민들에 환대를 받았지만 박 씨는 암담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현지민들의 생활을 눈으로 목격했지만 직접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먹을거리가 태부족했다. 여기에 낙후된 주거시설 또한 현대문명에 익숙했던 박 씨 또한 적응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오래 전부터 고민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내면서 그 곳 생활에 차츰 적응해 갔다. 먼저, 의료였다. 비록 자신이 전문 의료인은 아니었지만 돈이 없어 간단한 구급약품조차도 없는 주민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간 구급약품들로 치료를 했다.
특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한 학생은 손가락 신경이 끊어진 상태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손가락이 괘사가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이에 박 씨는 소독약품 들과 상처치료연고를 직접 발라주며 지극정성으로 치료를 해줬다. 박 씨의 노력이 통했는지 검게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손가락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이밖에도 박 씨는 일일이 구급약품들을 현지민들에게 나눠주며 사용용도 등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여기에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간 손톱깎이 등이 들어가 있는 반지함을 주민들에게 선물했다. 박 씨와 함께 간 지인은 선풍기 40여대와 에취기 10대, 비누 300여개를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등 전쟁과 가난으로 상처를 입은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20여일 가까이 동티모르에서 민간봉사활동을 마친 박 씨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앞으로 5년에 한번 씩 동티모르를 찾아 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일지는 몰라도 그들에게는 소중한 물품들을 꾸준히 모아 전달할 계획이다.
박 씨는 “이번 여행은 좋은 것을 보고 즐기기는 것보다는 15년 전 잊혀져 있던 친구들과 그들과의 추억을 다시 만나기 위한 시간이었다”며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우리 가족들 외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넉넉하진 않지만 한국에서의 내 생활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를 이번 여행을 통해 알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