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지난 2012년 대선 때, 김무성은 부산 유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나눈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줄줄이 읽어 나갔다.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NLL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고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김무성은 이 일이 문제가 되자 자기는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그의 발언은 실제 정상회담 대화록과 700자 이상이 똑같았다. 김무성 말고도 새누리당 여러 의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듬해 2013년 6월, 새누리당은 이 문제를 가지고 다시 문재인을 공격했다. 그러자 문재인이 나서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을 열람해 NLL 포기 발언이 사실이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까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발을 먼저 감행한 것은 김무성이지만 결과적으로 피해를 본 것은 문재인이었다. 나는 이 소동을 지켜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여야의 대표 정치인이 공통적으로 보인 역사적 무지와 역사정신의 결핍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조선시대의 사초(史草)와 똑같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김무성이 이를 열람, 공개한 것은 공공기록물법을 위반한 것이고, 문재인이 이를 까자고 한 것 역시 공공기록물법의 존재와 취지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점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옛날에 열국(列國)이 각기 사관을 두고 임금의 언행(言行)·정사(政事)와 신하의 시비 득실(是非得失)을 모두 바른 대로 쓰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그 시대의 임금과 신하는 그 시대의 역사를 숨겨서 뒷세상에 전하였으므로, 호령(號令)과 언어·행동의 즈음에 이로 인하여 경계로 삼아 감히 그릇된 짓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사관(史官)을 설치한 뜻이 깊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태조 7년 6월 12일, 어명에 굴복하여 조준 등이 이성계에게 사초를 올리려 하자, 사관 신개(申槩)가 불가한 일이라며 올린 상소의 일부이다. 이처럼 역사 기록의 공정성은 막중하기 때문에 당대 역사 기록인 사초(史草)는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볼 수 없었다.
사초란 현재 진행 중인 역사의 기록물이고 이것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실록(實錄)으로 만들어진다. 인류 역사상 가장 세심하고 탁월한 기록물이라고 평가되는 <<조선왕조실록>>은 사초에 근거한 실록들이 집대성된 것이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사초를 본 군주는 당태종이다. 재상 방현령은 황제의 협박에 굴복해 급히 사초를 뜯어고쳐 <실록>이라고 가제본해서 바쳤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 태종은 역사 기록의 정신에 불감한 황제로 오명을 남겼다. 한편 조선 태조 이성계는 “당태종도 사초를 보지 않았느냐?”라며 사초를 보겠다고 우겼으나 사관들은 굽히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이런 무리수를 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려 때의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 이행(李行)은 일찍이 공양왕의 지신사(知申事)였는데 직책이 사관 수찬(史官修撰)을 겸했다. 그가 이색과 정몽주에게 아첨하여,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과 변안열(邊安烈)을 죽였다고 사초를 썼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면서 이성계를 살인자로 모는 기록이었기에 이성계는 사실을 확인한 후 변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 말고도 사초에 개입한 왕은 연산군과 영조 두 명이 더 있었다.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고 한 것은 그 유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에서 할아버지 세조를 찬탈자에 비유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조가 사초를 문제 삼은 것은 자기를 선왕 경종의 독살자로 매도하는 유언비어가 사초에 실리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발췌본만을 열람했고, 영조는 사초를 직접 열람하지 않는 대신 폐기처분하고 새로이 쓰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태종은 자기 아버지와 자기가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가 궁금해서 <태조실록>을 빨리 편찬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사관들은 역사 기록의 공정성을 위해 3대 뒤에 편찬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자 태종은 자기에게 호의적인 사관들을 선발해서 실록을 서둘러 쓰도록 했지만 끝내 그 기록을 못 보고 죽었다. 아버지의 기록을 아들 왕이 보는 것까지 공정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도 할아버지 것인 <태조실록>은 봤지만, 아버지 것인 <태종실록>은 황희와 신개 등의 반대로 보지 못했다.
장구한 519년의 역사 동안 사초에 개입한 왕이 셋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눈앞의 정치적 실리에만 급급하는 정치인이 득실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 역사는 수준이 낮아도 이만저만 낮은 것이 아니다. 나는 김무성은 물론 문재인도 ‘사초정신’을 깨우치지 않는 한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