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북방한계선이 천리장성이라면 조선의 북방한계선은 압록강 - 두만강이었다. 천리장성에는 지금의 평안도 북동부와 함경도 전역이 들어 있지 않았는데, 이것을 세종이 여진을 정벌하고 4군6진을 개척함으로써 획기적으로 쳐올렸다. 그리고 이런 국경 개념은 이후 중국과 조선 양국에 오랫동안 공유되었다.
그럼에도 두만강 이북 지역인 간도의 우리 영토설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번 글에 언급했듯이 여기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 백두산정계비(이하 정계비)이다. 정계비는 1712년 청 황제 강희제 정부와 조선 왕 숙종 정부가 합의하여 세운 국경 표시 비석이다.
이에 앞서 청 황제 강희제는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니 백두산에 가서 이를 조선 측과 상의하여 분명히 하라는 지시를 총관 목금등에게 내렸고, 이에 부응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접안사로 참찬 박권을 선발하여 백두산에 파견했다.
정계비는 백두산 천지 동남쪽 4km 위치에 세웠는데 1931년 만주사변 직전에 사라지고 지금은 비석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만 있다. 이것은 1962년 이후 조선(공화국)에서 설치한 것이다.
문제는 원래 비문에 있던 문구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때문에 불거졌다. 직역하면 ‘서로는 압록이고 동으로는 토문이므로 분수령 위에(돌에 새겨 명기한다)’가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동위토문’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토문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지류니까, 송화강 이남(정확히는 남동)의 간도 땅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토문’은 강이 아니라 두만강의 발원 지점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개진해 왔다.
청조국경회담은 1875년과 1877년에도 있었다. 당시 황무지로 인식되었던 간도 땅에 조선인이 수만 명 이주해 가서 정착했고, 조선 정부가 행정력을 행사하게 되자, 청나라 측에서 다시 국경을 확실히 하자고 제안해온 것이다.
이 회담에 나간 조선인 대표는 청백리 이중하였다. 이중하는 처음에 곧이곧대로 토문강을 주장하다가 조금 물러서서 두만강의 4개 지류 중 최북단 지류인 홍토수로 경계를 정하자고 주장했는데 이에 청 대표가 응하지 않아 회담은 결렬되었다.
토문강 국경설은 이때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조선은 400여 년 동안 압록강 - 두만강 라인에 이의를 제기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약소국 조선은 오히려 이 라인을 지키기 위해 부심해 왔다. 사실 토문강을 국경으로 하면 이것이 송화강까지 이어져 지금 흑룡강성 하얼빈 시가 토막 나서 조선 영토가 되는 것이니 중국으로서는 황당하게 느꼈을 법도 하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1909년에 맺어진 청일간도협약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이 협약으로 일본이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다고 주장한다. 신형식(申瀅植) 간도학회 회장(상명대 초빙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그동안 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하는 강’이라 잘못 배웠다. 일제가 간도를 중국에 넘겨준 뒤 일부러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왜곡된 지리적 사실을 가르쳤고, 이를 광복 이후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간도가 조선 것이 아니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물론 침략자 일본이 조선 대신 맺은 조약은 국제법상의 문제점을 따질 것도 없이 모두가 원천무효이다. 하지만 우리는 애국적인 흥분에 앞서 역사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이 협약으로 일본은 간도를 넘긴 것이 아니라 백두산 영역의 산지 대부분과 천지를 넘긴 것이다.
다시 정계비로 돌아가 논의해 보자. 아래는 숙종실록 38년 1712년 5월 23일자 기사이다.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잘 읽어 보라. 이에 따르면 두 나라 대표가 동쪽의 국경은 두만강이라는 데에 사전 합의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두만강 국경선을 청측이 파기할까봐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다시 말하자면 문제는 두만강의 발원지라고 새긴 ‘동이토문’에 있다. 정계비가 세워진 지점에서 물길을 찾아 내려가면 중국의 오도백하(강)로 이어진다.(참고로 나는 오도백하에서 이도백하까지 답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송화강으로 연결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토문강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 ‘토문’이 강이 아니라 흑으로 된 절벽 또는 골짜기라는 견해도 있다.
놀랍게도 조선 조정은 몇 달 후 정계비 위치가 착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의 처리를 위해 장시간 회의를 한 기록이 상세히 <숙종실록>에 전한다. 결론은 기존 국경에 문제가 없고, 토문이라는 표기가 우리에게 손해될 게 없으니 문제 삼지 말고 덮자는 쪽으로 났다.
오늘날 한국인 학자의 견해 중에서는 당시 청나라 총관 목금등이 실수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내 나름의 고유하고도 설득력 있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논점에서 벗어나고 설명하기도 복잡하여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당시 청나라 강희제 정부의 측량기술과 지도제작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아무튼 압록 - 두만 국경설은 4군 6진이 완료된 1449년 이래 부동의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니 간도는 (우리가 중국을 침공하지 않고서는)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만약 옛날에 우리 땅이었으니까 돌려달라고 할 수 있다면, 중국도 신라 때의 대동강 이북과 고려 때의 청천강 이북이 중국 것이었으니까 돌려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중국경의 길이는 1370km나 된다. 이 긴 국경선의 대부분은 천혜의 압록강과 두만강 의해 경계가 뚜렷하다. 문제는 이 두 강에 있는 451개의 섬과 백두산으로 인해 끊어진 두 강 사이의 산지와 정상에 있는 호수 천지의 경계선에 있다. 사실 백두산정계비도 전체 국경이 아닌 백두산 지역의 경계를 확실히 하려는 목적에 세운 것이었다. 두 강의 섬들과 백두산 지역의 국경을 합리적으로 해결한 것이 1962년 김일성 - 주은래의 조중변계조약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논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