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읍 구 KT&G 뒤편으로 조금 가다보면 허름한 집 한 채가 나타난다. 겉으로 보면 별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겠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80~90년대 만화책을 보며 자라왔던 세대들의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의 방대한 양의 만화책들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미 만화책 수집가 사이에서는 ‘만화수집가’로 유명한 양덕진(41)씨의 집으로 얼핏 보기에는 작은 만화박물관이라 칭할 정도이다. 각각 다섯 평 남짓한 두 방에 진열되어 있는 만화책 양은 정확하게 세어보진 못했지만 대략 10만여권에 달한다고 한다. 장르도 무협에서 학원물, 판타지, 순정만화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화들이 빼곡하다.
일반사람들에게 요상한 취미라고 비춰질 수 있지만 양 씨에게 만화책은 친구이자 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습기가 많은 요즘 같은 시기에 행여 만화책에 곰팡이가 쓸까봐 제습기와 습도 조절용품들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다. 여기에 장르별로 책꽂이에 가지런히 진열하고 수시로 관리하면서 남다른 애정을 쏟아 붓고 있다.
이처럼 양씨가 만화책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군대에 입대했던 양씨는 휴가를 나왔다 충격에 휩싸이는 사건이 있었다. 입대 전 취미라기보다 어쩌다보니 모아둔 만화책이 있었는데 모두 사라진 것.
당시 대개의 부모님이 그렇듯 쓸데(?)없는 잡쓰레기라고 생각하신 어머님이 고물상에 팔아버린 것이다. 당시 5박스 정도에 달했던 만화책들의 대가는 빨래비누 몇 개가 전부였다. 지금과 같이 만화책에 대한 애정이 강했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왠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모두 사라진듯한 애통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다시 모으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이 양씨의 설명이다. 특히 군 제대를 하고 집에 왔을 때마저도 그의 손에는 만화책 보따리만 있을 정도였다. 양씨의 만화책 수집방법은 다양하다. 만화책방이 폐업하는 곳에서 구입을 하거나 중고책방, 인터넷 경매 등을 주로 이용한다.
요즘은 만화책방이 많이 사라진 탓에 오프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한꺼번에 1만권 가량을 구입해 배달기사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이다.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월급 70%를 만화책 구입에 투자했고 지금의 10만여권의 만화책을 보유한 진정한 ‘만화책 수집가’로 얼마 전에는 TV방송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 제작진이 이곳을 찾아 촬영을 하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곳에 모아져 있는 만화책을 모두 팔면 영암에서 아파트 2채 값은 거뜬하게 나올 정도로 재산으로서 가치도 상당하다는 것이 양씨의 부연설명이다. 양씨 나름대로의 재테크인 셈이다.
10만여권에 달하는 수많은 만화책 중 양씨가 가장 아끼는 만화책은 순정만화잡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잡지인 르네상스부터 윙크, 밍크 등 국내에서 출판된 40여종 중 32종가량을 수집했고 ‘특별관리’ 중이다.
여기에 아이큐점프와 소년챔프, 요요코믹스 등 다양한 만화잡지들이 책꽂이에 자리를 잡아갈 때면 양씨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는다. 자신이 15년 동안 모은 수집품들이 단순히 한번 보고 마는 만화책들이 아닌 자신의 유년시절의 추억이 담겨있고 한 시대를 추억하는 소중한 애장품이 되기 때문이다.
양씨의 꿈은 영암에 만화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경제적인 이유로 그 꿈을 미뤄놓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럴듯한 곳에 만화박물관을 세우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추억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싶은 것이 양씨가 꿈꾸는 미래이다.
양씨는 “제가 가정을 이루고 누군가가 싫은 소리를 했다면 지금과 같이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을 거에요”라며 “지금도 만화책이 좋고 살고 있으니 만화책하고 결혼한 거나 다름없죠”라고 수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