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암읍 교동로 조 동 현

지난 6월 18일(토요일) 7시30분. 영암문화원 기행단 130여명은 관광버스 3대에 분승하여 영암을 출발하였다. 이리 저리 분망하게 뛰어 다니는 문화원 직원들의 도움으로 나는 1호차에 승차하였다. 목적지 전북 부안을 향해 달리는 차창 밖에는 유월의 싱그러운 녹음이 비치어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설레게 하였다. 綠陰芳草勝花時(녹음방초승화시), 당나라 시인 두보는 어쩜 그토록 ‘녹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감지하고 노래하였을까?
‘梨花雨(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추풍낙엽)에 그도 나를 생각날까,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여라’고 노래했던 16세기말 부안의 유명한 기류 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이매창의 유적지 탐방이 주 목적지였는데 먼저 부안의 석정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석정 문학관’… 낯 서른 곳이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그런데 볼수록 석정 선생님의 시(詩) 세계가 우러러 보였다. 석정과 함께 ‘모란꽃’의 시인 영랑이 있었고 ‘바람이 분다, 가을이 온다’고 노래했던 김기림 서울대 교수,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게오’라고 노래한 이병기 교수님도 있었다. 나는 어찌 이토록 위대한 부안의 석정 시인을 몰랐을까? 스스로 무식 몽매함이 부끄러웠다. 석정문학관을 떠나 이윽고 매창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유적지 입구에 ‘贈醉客(취하신 님에게)’라는 매창의 시비가 있었다.

醉客執羅蔘 羅衫隨手裂
(취객집라삼 나삼수수열)
不惜一羅杉 但恐恩情絶
(불석일라삼 단공은정절)

취한 손님이 명주 저고리를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 저고리 소리 내며 찢어지네.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마는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끊어질까 그것이 두려워라.

그래! 사랑이 끊어질까 두려워하는 애틋한 심정을 노래한 시구의 뜻을 모를까 마는 나는 또 다른 느낌에 사로 잡혔다. 불쌍한 기생의 신세. 매창은 1573년 고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하여 훈장질로 연명하면서 매창을 남복시켜서 이곳저곳 서당방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따라서 매창은 남자 차림으로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글을 배우기도 하고 밥을 구걸하기도 하였다. 어머니 없이 가난한 홀아버지 품에서 사내 아이차림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란 설음이 오죽하였을까?
열, 예닐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태수 서진사의 권력에 눌려 정조를 빼앗겼다. 양반의 권세에 눌려 정조를 잃은 그는 암울한 생활고 끝에 기생이 되었다.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끊어질까 그것이 두려워라’, 귀하고 값비싼 명주 저고리 보다 임이 준 사랑을 더 소중이 여긴 시의 뜻은 알겠으나 어쩐지 계층 사회의 벽이 두터웠던 당시의 갑질에 대한 을의 설음, 강자에 맞서는 약자(기생)의 설음은 없었을까? 술에 취해 여인의 옷을 잡아 찢다니! 오늘날에야 중죄에 속하는 성폭력이 아니겠는가? 씁쓸한 여운이 밀물처럼 몰려와서 가슴을 에어 짰다.
불쌍한 매창, 조선 굴지의 여류 시인 매창, 열여덟 어린 나이에 마흔 여섯 살의 유희경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유희경과 매창, 그들은 신분상의 동질성과 시의 세계에서 고귀한 사랑을 맺었었다. 엄격한 계층 사회에서 기생이란 약자의 신분으로 강자들에 할퀴고 뜯기면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고달픈 인생을 살다 간 매창, 조선의 천재 여류 시인의 조촐한 무덤 앞에서 명복을 빌며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參差山影倒江波 重柳千絲掩酒家
(참차산영도강파 중류천사엄주가)
輕浪風生眠鷺起 漁舟人語隔煙霞
(경랑풍생면로기 어주인어격연하)

들쑥날쑥 산 그림자 강 물결에 어리고
수양버들 천가닥이 주막을 덮었구나.
잔물결 바람결에 잠든 백로가 고개 들고
고기잡이 말 소리는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네.

주옥같은 시 백여 수를 남기고 불우한 처지에서 살다간 우리의 매창을 기리며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점심 식사 후 석정 문학관과 매창의 유적지를 떠나 13시 30분 고창으로 이동하였다. 고창 선운사 입구 하천 양편 일대에서는 수박과 풍천 장어 축제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축제 공연장에서는 음식물 만들기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는 일본어로 쓰인 음식 종류에 따라서 만들기, 시식, 시상 순서로 진행되었다. 남이 애쓴 축제 마당에 가타부타 입질하는 건 실례겠지만 경연대회 음식 종류 표기는 우리말을 썼으면 하는 간절한 아쉬움이 있었다.
1. 장어 타마고 도우후 : 장어, 달걀, 두부로
2. 장어 우엉 마끼 : 장어 우엉말이로
3. 장어 구시아게 : 장어 볶음으로
국수주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독도문제 등으로 일본의 패권주의가 시끄러운 작금의 국제 정세가 아닌가? 달걀을 꼭 일본말 표기로 타마고로만 해야 되겠는가?
요리경연 대회에 이어 음악 경연 대회가 열렸는데 우리 영암문화원 기찬 풍물패와 신바람 예술단이 경연에 참여하였다. 영암아리랑을 배경 음악으로 춘 부채춤이 월등하여 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일행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17시 무안군 남악신도시에 있는 남도소리울림터로 이동하여 우리 춤과 음악 공연을 보고, 20시 영암 문화원에 되돌아왔다. 부안 유적 답사 이후 석정선생의 주옥같은 시와 매창의 四端七情(사진칠정)을 도려내는 듯 애절한 시구가 그의 불운한 생애와 함께 메아리쳐서 깊은 애수에 잠기게 하였다.
오늘의 문화기행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의 삶의 자취가 자랑스럽고, 삶의 자취들이 결집된 문화의 도도한 大河(대하) 속에 살고 있는 긍지를 새삼 느꼈다. 그리고 이토록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 주신 문화원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