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나는 국문학과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에 학부 4년을 포함하여 9년 동안이나 다녔다. 하지만 별로 성취한 것이 없다. 집에서 혼자 1년이면 될 공부를 9년 동안이나 돈 써가며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내가 젊어서 쓴 소설들은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신인 시절의 내 소설이 몇 유수 대학의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내 소설은 주로 대학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것 같다.
젊은 시절 서양식 소설을 주로 쓰던 나는 유명 문인들과 자주 교유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대체로 문약하면서도 위선적이었다. 특히 여류 문인들의 통속성은 보아주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역사의식이 없었다. 문인들에 대한 실망은 내 문학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전적으로 이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꽤 긴 세월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
내가 역사 공부를 새로이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 때부터의 일이니 대략 15년 정도가 된 것 같다. 남도에서 자란 나는 소년시절 막연히 북방의 대륙과 백두산과 두록 양강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소설을 쓰더라도 그곳을 배경으로 하고 싶었다. 역사 지식이 얕았던 나는 그곳에서 말을 달리면서 반일항쟁을 하고 더불어 사랑도 성취하는 로맨틱한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근현대사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년의 나이에 시작한 역사 공부는 번번이 나를 좌절시켰다. 나는 내가 우리 역사에 너무도 무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좌절시킨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무지는 학습을 통해 깨우치면 되는 일이었다.
나를 좌절시킨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식민지 지식인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서구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빠진 채 살아온 삶은 당연히 상당 부분 헛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치욕적인 좌절의 시점으로부터 나의 역사에 대한 예민한 관심은 오늘까지 쉬어 본 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었던 역사는 왜곡된 것 일색이었다. 그것은 거악이 은폐되고 차악이 부각된 역사였다. 그것은 지선을 은폐하기 위하여 위선을 부각시킨 역사였다. 그리하여 나의 가치는 비하되고 남의 가치만 동경해 온 역사로 일그러져 있는 것이었다.
소설을 쓰는 나의 최종 가치는 ‘인물’에 있다. 인물을 잘 만들어야 소설도 잘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일단 인물 평가에서 아주 불공정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자면 나는 다산 정약용과 도산 안창호 등을 우리 역사에서 과대평가된 인물로 간주한다. 다산뿐 아니라 대부분의 실학자라는 사람들이 과대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도산뿐 아니라 대부분의 계몽운동가들 역시 과대포장되어 있다.
실학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다. 일단 실학이 있어야 기존의 성리학이 ‘허학’이 될 수 있다. 실학에 근대성이 있다는 논리도 있지만 그것 자체가 근대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논리에 불과하다. 근대주의로 근대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비교적 흠결이 없는 계몽운동가들이 부각되어야 위협적인(?) 무장항쟁가들의 돌출을 방지할 수가 있다.
결함 없는 천재는 없고 오욕 없는 영웅은 없는 법이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서 여전히 천재이고 영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역사는 천재에게서 결함을, 영웅에게서 오욕을 들춰내어 그들을 사장시킨다.
조선을 진정으로 강하게 만든 인물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 대신 조선을 비판하는 데 기여한(?) 인물들은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 결국 이런 관점은 의도가 어떻든지 간에 조선의 역사 자체를 백안시하게 만든다.
나는 요즘 조선 역사를 다시 공부하며 하찮게나마 ‘조선역사 에세이’라는 것을 연재하고 있다. 내 능력으로 많은 것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역사적 인물에 대해 공정히 평가하는 것을 내 글의 1차 목표로 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