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우리 사회에는 ‘조선이 고려만 못했다’는 관점이 여전히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조선폄하론’은 최근 들어 대폭 교정되고 있지만, 8.15 이후 수십 년 동안 남과 북 학계에서 정설처럼 공유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법륜 같은 이는 “조선이 고려만 못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중국의 경우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즉 청(淸)이 ‘명(明)보다 나빴다’는 이른바 ‘청나라폄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으로 1912년 중화민국을 발족시킨 손문은 혁명 과정에서 아예 ‘만주족을 퇴치하고 한족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했고, 이에 따라 청조 타도 투쟁이 실제로 전개되기도 했다.
물론 망국의 과정에서 청왕조가 보인 반동성은 따로 지적되어야 하지만, 전반적으로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나빴다는 관점은 온당치 않다. 청나라는 19세기 초반, 즉 아편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GDP의 30%를 차지한 지구상 최고 부국이었다.
계급투쟁의 혁명과정에서 전제왕조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이북)이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이북)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 나머지 혁명 직전 왕조인 조선왕조를 더욱 폄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청왕조와 조선왕조는 엄연히 다르다. 조선왕조는 유럽이나 중국 식의 전제왕권이었다고 할 수 없다. 청왕조 타도 투쟁이 전개된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조선왕조 타도 투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심지어 초창기 항일투사 중에는 조선왕조 부활을 내건 복벽주의자들이 더 많았다. 동학항쟁에서도 조선왕조 타도가 제창된 적이 없다. 따라서 동학항쟁을 ‘동학농민전쟁’이라고 명명한 이북 학계의 주장은 매우 부당한 것이다.
시대의 우열을 논하는 데에 일률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 평등, 민본 등의 가치 실현과 공동체 다수의 행복지수 그리고 문화 창조의 수준 등은 시대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유용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에 비해 확실히 진보한 시대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고려를 나쁘게 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고려왕조 역시 신라 - 발해의 남북조시대보다는 확실히 진일보한 시대였다. 하나 더, 내가 조선을 좋게 말한다고 해서 조선 말기까지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말기 바란다.
왕조 멸망의 1차적 원인은 수구세력의 극대화된 탐욕에 있다. 고려가 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조금 다르다. 조선 말기 수구세력의 발호가 극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조선은 자체로 개혁이나 혁명을 통해 재생할 문화적 저력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앞잡이가 된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침공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조선은 이중 변고로 인해 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