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시사평론가 김 갑 수

역사는 ‘선택과 배제’에 의해 대단히 능률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일례로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교학사 교과서를 보자. 이 책은 이승만을 9번 선택, 기술했지만 김구는 3번밖에 선택, 기술하지 않았다. 물론 이승만의 생존기간이 길었고 그가 초대 대통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이승만을 격상시키고 김구를 격하시킨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안창호는 단 한 번도 선택, 기술하지 않았을까? 이 책이 안창호를 김구보다 더 부정적으로 보아서셨을까? 아닐 것이다. 이 책이 안창호를 선택, 기술하지 않은 데에는 보다 더 교묘하고도 자의적인 역사 왜곡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안창호는 일정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승만보다는 우월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안창호는 여러모로 이승만과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 안창호의 무실역행론이나 기독교주의 그리고 미국 취향은 이승만의 것과 유사하다. 안창호의 ‘온건론’은 이승만의 ‘타협론’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교학사 교과서는 안창호를 부각시킬 경우 상대적으로 이승만이 비교 격하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안창호를 단 한 번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선택과 배제’에 의해 대단히 능률적으로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역사란 사실이라고 선전하는 거짓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난점은 사실만으로 기록된 역사 즉 주관이 배제된 역사도 바른 역사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일제강점기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은 철저히 주관을 배제한다고 했다. 결과 역설적으로 실증사학은 가장 자의적인 왜곡과 조작이 많은 불량한 역사가 되었다. 반면 오늘날 엄정한 역사서로 평가 받는 『사기』의 「공자열전」이나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의 변’ 등에서는 주관의 극치가 엿보이기도 한다.

역사는 대부분 승자가 기록한다. 고려 창업의 승자는 궁예가 아니라 왕건이었다. 왕건은 대지주였다. 그리고 왕건은 한때 궁예의 부하였다. 반면 궁예는 무산 개혁가였다. 궁예에게는 30여 종의 저서가 있었다. 하지만 『고려사』는 왕건을 격상시키고 궁예를 격하시켰다.

왜 망한 나라의 군주는 죄다 무능력자 아니면 주지육림에 빠진 패륜아로 남아 있을까? 그것은 그들이 실패자였기 때문이다. 백제 의자왕이나 신라의 경순왕, 조선의 고종 그리고 중국 상나라의 주왕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역사왜곡을 극복하는 지름길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역사를 제대로 앎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먼저 일착으로 식민지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일제는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전 시대 특히 조선의 역사를 극도로 왜곡, 폄하했다.

일단 식민지 침략이 정당화되면 분단과 독재에 면죄부를 주게 되어 현대사를 용이하게 왜곡할 수가 있다. 그러니 역사를 공부할 때 왜곡의 선후 인과관계를 따져야 한다. 이에 따라 먼저 일제강점기부터 공부한 후 조선사와 현대사까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근·현대 역사왜곡을 제대로 격파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주의’의 악덕을 바로보아야 한다. 근대화주의란 제국주의가 쓴 허울 좋은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김옥균, 이광수, 장덕수를 비롯한 친일파 대부분과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김문수 그리고 뉴라이트와 현대사학회 학자들은 하나같이 근대화주의자들이다.

다음으로 역사왜곡은 수구보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노무현, 2002년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의 이 연설을 멋진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노무현의 이 언명에는 단순한 선의로 인해 빚어진 무모한 역사인식이 개입되어 있다. 노무현은 제국주의 침략 이전의 조선을 제국주의 침략이 만들어 낸 근·현대의 왜곡된 역사와 무작정 일맥으로 상통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식민지 역사의 중요성을 놓쳤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많은 독서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의 독서는 사회과학과 현대사에 치중된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인문학과 근대사 특히 조선 역사에 대한 독서와 사색이 적었던 것이다.

이런 부작용은 지난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때 많은 진보적 지식인이 양비론을 취했다. 한국에서 입진보, 유사진보가 양산되는 것은 식민지 역사와 조선 역사에 대한 정확한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사대’를 극복하고 ‘자주’를 성취해야 한다. 조선 역사를 제대로 알면 북한이 얼마나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인지를 저절로 체득하게 된다. 조선의 진정한 가치를 덮어둔 채 서구의 근대적 가치만 편중되게 중시하니까 ‘반북진보’라는 기형아들이 출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