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印象) 쇼와 천고정(千古情) 쇼

중국 답사 4박5일 동안 두 군데 쇼를 관람했다. 둘째 날(10월 31일) 저녁 무이산 ‘대홍포쇼’와 넷째 날(11월 2일) 항주의 ‘송성가무쇼’가 그것인데, 대홍포쇼가 인상(印象) 쇼라면 송성가무쇼는 천고정(千古情) 쇼라고 칭한 점이 흥미로웠다. 또한, 대홍포쇼가 무이산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한 야외 공연이었다면, 송성가무쇼는 대형 극장 안에서 펼쳐지는 실내 공연이었다. 비록 무대는 서로 달랐지만, 두 공연 모두 신화나 전설을 모티브 삼아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서 화려하고 흥미 있는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그 안에서 무언가를 획득하고자 하는 서양의 세계관과 달리, 자연 속으로 깊이 침잠(沈潛)하여 하나가 되는 동양적 세계관의 표출로서,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농경사회 중국인들의 삶의 철학이 반영되었으리라 짐작(斟酌)해 보았다.

빛의 조련사 장예모(張藝謀)

둘째 날 오후 무이9곡계 뗏목 여행에서 무이산의 산수를 만끽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저녁에 ‘인상 대홍포’를 관람했다. 매표소로 가는 길목 초입에서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양옆 가판대마다 각종 찻잔 세트 등 대홍포 차와 관련된 제품들을 진열 판매하고 있었다. ‘관람 끝나고 이 자리에서 보자’는 가이드의 당부를 새기며 지정된 야외석에 앉았다. 쇼가 시작되자마자 빛과 어둠이 교차되며 무대가 바뀌는데, 회전하는 곳이 무대인지 객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이 쇼는 전설로 남은 무이산 옥녀봉과 대왕봉의 사랑 이야기를 차 제조과정과 효능 속에 맛깔나게 녹여낸 듯했는데, 무엇보다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유명한 장예모 감독이 연출했다고 하니 더욱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대왕봉과 옥녀봉, 그리고 강물 위를 수놓을 때마다 20대 때 접했던 영화 속 강렬한 붉은 빛이 오버랩되어 깊은 인상(印象)을 심어 주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전투 중 ‘추알’이 일본군 기관총 세례에 쓰러지고, 수수밭 대지 위에 우뚝 선 ‘유이찬아오’ 부자의 머리 위에 찬란히 떠 있던 피덩이 같은, 붉은 해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무이산 계곡에서 대홍포를 입고 부활한 것 같았다. 과연 장예모 감독은 빛의 조련사였다.

給我一天還你千年(급아일천환니천년)

넷째 날인 11월 2일(목) 항주의 마지막 밤은 ‘송성(宋城) 테마파크’에서 시작되었다. ‘송성’은 당시 항주를 수도로 삼았던 남송(南宋) 시대 성곽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항주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서호 일정을 마치고 저녁 시간 공연을 보기 위해 서호 남쪽에 위치한 테마파크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 당도하니 높은 탑 모양의 구조물에 새겨진 붉은색의 커다란 문구가 우리를 압도했다. ‘宋城景區-給我一天還你千年(송성경구-급아일천 환니천년)’이라..., 무슨 말인지 몰라 여기저기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나름 풀이해 보았다. “여러분, 이곳 ‘송성풍경구’에 잘 오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게 하루를 주신다면, 저는 당신에게 천년 전 남송시대를 드리겠습니다.” 정도일 것 같은데, 그렇게 깊은 뜻을 저 간결한 뜻글자 속에 함축해 놓았다니 과연 ‘천고정(千古情)’의 현장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입장하기 전부터 긴 줄을 이루며 저마다 한껏 들떠있는 인파를 보니, 과연 세계 3대 쇼 중의 하나라는 말을 고스란히 실감할 수 있었다.

이야기꾼(Storyteller) 장예모(張藝謀)

장예모 감독에 대해 두 가지 점이 새삼 놀라웠다. 첫째는, 대홍포쇼에 이어 송성가무쇼 역시 그가 연출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가 자연과 어우러진 화려하고 역동적인 무대조명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옛이야기를 과거와 현재의 역사 속에 가미시켜 흥미롭게 재생(再生)시킨 타고난 ‘스토리텔러’라는 점이다. 송성가무쇼 총 4막 중 2막인 악비(岳飛)와 김올출의 전투 장면과, 3막의 백사(白蛇)와 허선(許仙)의 사랑이야기는 이제는 생명력이 소진된 듯 보였던 빛바랜 ‘스토리’들을 짧은 시간 최대 효과로 무대 위에 옮겨다 놓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서호의 홍루(紅樓)와 단교(斷橋), 뇌봉탑(雷峰塔)과 함께, 장예모의 송성가무쇼가 있는 한 백사전(白蛇傳)은 또다시 많은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