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대의 대회전 승리

소배압이 지형의 이점을 포기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서둘러 귀국하고 싶은 마음에 빨리 승부를 보는 길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야전이라면 유목(遊牧)제국 거란군이 정주(定住)문명국인 고려·송의 군대보다 월등했다. 통주 전투와 곽주 전투에서 고려군을 섬멸하여 실력을 증명한 적도 있다. 소배압이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침내 귀주 벌판에서 양군이 격돌하였다. 겨울의 북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양쪽 진영이 팽팽히 맞서며 좀처럼 승패가 나지 않았다. 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김종현이 이끄는 1만 기병대가 귀주에 나타났다. 김종현은 강감찬의 명령으로 한 달 동안 소배압을 추격해왔는데 극적으로 마지막 전투에 가세했다. 김종현 부대가 몰고 온 충격과 공포가 거란군을 강타하며 전세를 뒤흔들었다. 때마침 북풍이 돌변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남쪽에 자리한 고려군이 활쏘기에 유리한 풍향이었다. 고려군이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게 싸우자 거란군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패배를 직감한 거란군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나자 고려군은 추격하여 섬멸 작전에 돌입했다.

반령의 들판에서 강민첨이 북을 치며 돌격하자 고려군이 사로잡거나 죽인 적의 수가 1만에 달하였다. 침략자를 향한 징벌이 끝났을 때 시체가 들판을 덮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 돌아간 적군은 수천에 불과했다(1019년 귀주대첩). 이 승리로 26년 간 이어진 고려거란전쟁은 종결되었다. 승리의 주역 강감찬은 ‘정책을 결정할 때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이 되었다’는 평을 받았는데 오늘날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우리 역사의 삼대첩을 이뤄낸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야율문수노는 소배압의 대패에 격노하며 “너의 낯가죽을 벗겨내 죽이겠다”라고 책망하였다.(물론 정말로 그러하진 않았다.) 전쟁 후 야율문수노는 전사자를 유공자로 대우하며 유족들을 위로하였는데 이때 전사자 중에 고청명(高淸明)이란 이가 있었다. 그의 직함은 발해상온(渤海詳穩)으로 고씨 성을 지닌 발해계 거란인으로 발해인 부대를 지휘하던 중 전사하였다. 지난 제1·2차 침공 때 대도수가 고려에 종군했다면 고청명은 거란에 종군했다. 발해인이 동족상잔의 희생양으로 전락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거란국의 구성원에는 거란인, 한인, 여진인, 튀르크인 뿐 아니라 발해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고국이 멸망한 후 발해부흥운동 세력, 고려, 거란, 여진으로 흩어져 있었다.

전쟁 후의 이야기

2월 6일(음) 현종은 친히 영파역(황해북도 금천)에 나아가 개선군을 맞이하였다. 이어 금화팔지(가지 8개가 달린 금으로 만든 꽃)를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술잔을 들고 오른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아 위로하고 찬탄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강감찬이 절을 올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또한 영파를 ‘흥의(興義, 의로움이 흥함)’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귀주대첩 후 야율문수노는 고려 정복을 완전히 단념하고 친조와 강동 6주 할양 등의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종전 후 고려와 거란은 사신을 교환하며 관개개선의 의지를 보였고 현종이 1020년(현종 11) 이작인을 파견하여 예전처럼 번국(藩國)을 칭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줄 것을 청하며 5년 간 억류하였던 야율행평(야율자충)을 송환하였다. 물론 거란은 이것을 ‘항복하는 표문’이라 칭하며 ‘왕순의 죄를 용서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 어쨌든 고려는 거란의 통치질서에서 제후국으로 사대하는 형식으로 거란과 다시 통교하였다. 수직적 위계를 전제하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따라 고려 또한 제후의 위치를 벗어나진 못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거란의 침공을 무력으로 격퇴한 것은 분명했기에 거란과의 군신 관계는 형식에 불과했으며 이는 명·청이 가하는 실질적인 위력에 복속해야 했던 조선의 경우와 질적으로 달랐다.

그러한 대외적 관계의 안정 속에 동아시아는 여진족이 흥기하는 12세기 초까지 90여 년 간의 평화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기간 고려는 거란·송·서하가 공존하는 다극적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할 만큼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며 백 년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한편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것 외에도 농업진흥, 초조대장경 간행,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명의 왕의 행적을 기록한 《칠대실록》 편찬, 개경의 나성(羅城) 축조 등 다양한 업적을 해냈다. 그러나 일평생 내내 혹독한 고초를 겪었던 탓인지 1031년(현종 22) 5월(음)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한 달 뒤 침략자 야율문수노가 세상을 떠났다.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또한 8월(음)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여요전쟁의 주역들이 같은 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