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

244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1만 병력을 거느리고 침공했다. 그러나 동천왕은 2만의 병력을 동원해 비류수에서 관구검을 격파하니 이 때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이었다. 또 병력을 이끌고 양맥의 골짜기에서 재격돌했는데 이번에도 대승을 거두어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여 명이었다. 두 번의 승리로 적군의 총원 중 과반을 소멸시킨 것이다. 신이 난 동천왕이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魏)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魏)의 명장이지만 오늘은 목숨이 내 손안에 있구나.” 그리고 철기(鐵騎) 5천을 앞세워 공격하였다. 그는 승리를 100% 확신하고 있었고 이는 당연한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방심이 지나쳤던 탓일까. 고구려군은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는 위군에 참패하였다. 이때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두 번 싸워 대승을 거둔 군대가 단 한 번의 전투로 몰살당한 것이다. 관구검은 기세를 몰아 고구려의 서울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대대적인 약탈을 감행했다. 주력군이 궤멸당하고 왕이 도망친 현실에서 성 안은 도륙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으로 변하였다. 고구려의 서울을 마음껏 능욕한 관구검은 ‘불내성(不耐城, 지키지 못한 성)’이란 조롱의 글귀를 새기고 부하 장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왕을 계속 추격케 하였다.

오만함으로 사로잡혀 국가를 붕괴시켜버린 동천왕은 이제 목숨마저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위나라 군에 계속 쫓기던 중 ‘밀우’라는 사람이 자신이 버텨낼 동안 피하라고 말하였다. 밀우가 결사항전하는 사이 가까스로 몸을 피한 동천왕은 이제 밀우를 구해낼 사람을 찾았는데 이 때 ‘유옥구’란 이가 전장으로 달려가 쓰러져 있던 밀우를 업고 돌아왔다. 두 전사의 활약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위기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동천왕이 전전긍긍하던 때에 ‘유유’가 나서서 자신이 적장을 찾아가 거짓항복을 할테니 그 사이 적을 치라는 계책을 내놓았다.

유유가 적 군영에 들어가 왕이 항복하겠다며 자신을 앞서 보냈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여기에 속은 적장이 항복을 받으려 하자, 유유는 식기에 감춘 칼을 빼내어 먼저 적장을 죽이고 자신 또한 자결하였다. 찰나의 순간에 지휘관을 잃은 위군은 통제력을 잃고 혼란에 빠졌고 동천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해 위군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비록 왕조가 멸망하진 않았으나 참혹한 패전을 겪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동천왕은 이 패전의 책임자였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동천왕을 향한 지지와 사랑은 여전히 높았던 것 같다. 248년에 동천왕이 사망하자 왕의 은덕을 사모해 많은 백성들이 따라 죽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섶(柴)으로 죽은 사람들을 덮어 주니 그 묻힌 곳을 ‘시원(柴原)’이라 하였다.

동천왕에 이어 제12대왕 중천왕이 즉위했다. 259년 위나라는 ‘위지해(또는 울지해)’라는 장수로 하여금 고구려를 재침하였는데 이때는 중천왕이 정예 기병 5천을 선발하여 양맥 골짜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때 베어버린 머리가 8천여 급이었다고 하니 과거 중국에 당했던 부왕(父王)의 치욕을 아들이 완벽하게 복수한 셈이다.

이상이 고구려와 위나라 전쟁의 전말이다. 저 유명한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굴욕의 역사를 남겼다는 것에 당황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고구려하면 무의식적으로 요동을 호령했던 강대국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3세기 고구려는 위나라에 속절없이 요동을 내줘야 했고 요동의 지배권을 탐내다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중소국가에 불과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라는 고구려는 5세기 들어서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완성형’ 국가로 탄생하였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은 아직 고구려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일깨워준 뼈아픈 역사의 가르침이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