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사람들은 흔히 세조가 왕권을 찬탈하기는 했지만 즉위 이후에는 면모를 일신하여 좋은 정치를 펼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여기에도 식민사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혐의를 갖는다. 식민사관은 조선에 진짜 이로운 일을 한 인물은 폄하하는 한편 조선을 해롭게 만든 인물을 교묘히 부각시키는 수법을 구사했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에 출간된 이광수의 <단종애사>는 자기과오에 대해 처절하게 괴로워하는 세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가 알듯이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사육신을 주살했다. 그런데 우리는 태조와 태종에게는 ‘이성계’ ‘이방원’ 하면서 함부로 이름 석 자를 부르지만, 세조에게는 대부분 ‘세조’라고 하지(‘세조’는 군주에게 붙일 수 있는 최상의 묘호다.) 수양대군이라는 호칭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세조는 태조나 태종에 비해 열등한 인간이었다. 운니지차(雲泥之差, 구름과 진흙의 차이)라고나 할까? 단언하건대 세조는 즉위 후에도 ‘세조’다운 면모를 보인 적이 한 번 없다. 그는 죽을 때까지 권력에 집착했던 ‘수양대군’이었을 따름이다.
앞의 글에서 나는 세조가 가장 집착했던 것이 왕권 강화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왕권 강화책은 오히려 왕권을 타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절대군주로 군림한 것 같지만 실록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르다. 그는 하급 신하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냉혹했던 반면, 힘 있는 공신들, 예컨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에게는 비굴하리만치 타협적이었다.
세조는 부단히 성리학을 폄하하려고 했다. 이것은 일단 신하들이 성리학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성리학은 군신의 도에 합리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군주로서 세조의 가장 큰 약점은 ‘합리성의 부재’였다고 본다.
1446년 세조가 예문관 학사 김종련에게 취한 조치는 비합리의 극단을 보여준다. 실록에 상세히 기술되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세조는 김종련에게 <논어>을 강론하게 하고는 성리학의 시조 격인 주자의 오류를 지적하는 발언을 듣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세조는 김종련에게 ‘태극이 이(理)인가 기(氣)인가’를 물었다. 김종련이 대답하기를, ‘선유(先儒)의 말에는 태극(太極)은 이미 기(氣)에 속해 있다고 하는데, 주자(朱子)의 말에는 이(理)라고 했으니, 신(臣)은 마음속으로 주자(朱子)의 설(說)을 그르게 여기지만, 감히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묻기를, ‘바로 마음에 있는 대로 고(告)할 뿐이다. 주자(朱子)가 그대의 군부(君父)가 아닌데 무슨 이유로 감히 그르다고 하지 못하는가? 선유(先儒)들이 주자(朱子)를 폄론(貶論)한 사람이 많으니, 비록 주자일지라도 어찌 틀린 곳이 없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臣)도 또한 틀린 곳을 많이 보았지마는 다른 사람이 두려워서 감히 아뢰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세조가 묻기를,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공론(公論)을 두려워합니다.’라고 답했다.
- 이상 <세조실록> 1466년 9월 2일 기사 참조
김종련은 왕이 원하는 대로 주자를 비판하고 싶지만 천하의 공론이 두려워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것은 듣기에 따라 왕권보다 공론이 더 부담스럽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세조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재차 캐묻는다.
“공론이란 무엇인가?”
“유자(儒者)들의 의견입니다.”
이에 세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날카롭게 대응한다.
“유자들이 모두 공론이 있다면 조정 대신도 모두 유자인데,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이 나라에는 권신(權臣)이 없는데,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김종련 역시 합리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사실 이것은 얼마든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정6품 김종련을 추궁하여 그를 왕권을 경시하는 불온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세조는 의금부에 명해 김종련을 압슬형(壓膝刑, 피의자의 무릎에 무거운 물건을 얹어 놓고 조사하는 고문형)으로 신문케 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세조는 김종련과 그 자손을 내수소의 종으로 편입시켰다가 끝내는 그해 연말에 김종련을 참형에 처했다.
이것은 세조가 보인 의도적인 냉혹함이었다. 하지만 세조는 이런 냉혹함을 사람에 따라 달리 구사했다. 앞서 세조가 한 말 중 ‘이 나라에는 권신이 없다’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세조의 시대에는 권신이 유달리 많았다.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이 대표적인 권신들이었다.
권신들에게 세조가 보인 태도는 앞서 표현대로 ‘비굴하리만치’ 나약하고 타협적이었다. 결국 세조는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인격체였다. 권신들은 세조의 후임 성종 때에 더욱 힘을 불렸고 이것은 연산군의 사화를 촉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화는 왕권의 타락 때문에 빚어진 참화였다. 이런 점에서 나는 세조가 역사에 끼친 해독은 연산군 이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