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1430년 세종 12년 11월 23일 경연(經筵)에서는 고려 말의 정세와 인물들에 대한 논평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세종은 최영, 이색 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논평을 하지만 삼봉 정도전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세종은 경연관 안숭선이 정도전을 비판하는 말을 했을 때 끝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세종은 즉위 초기(세종 4년 윤 12월 8일) 태조 이성계가 공신들에게 내린 교서와 공권을 소각했을 때에도 삼봉의 화상은 가족에게 온전히 되돌려 주도록 조치한 바가 있다.
 삼봉 정도전과 세종은 정치철학 면에서 거의 일치되는 모습을 보였다. 앞글에서 언급했듯이 세종은 삼봉이 제시한 군신공치론을 선택했다. 또한 세종은 삼봉이 제시한 민본정치론에 적극 공감하는 언명을 일관되게 보이고 있다.
 민본이란 본래 『서경』에 나오는 말로서 민유방본(民惟邦本) 즉 ‘백성이 오로지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조선왕조실록》에서 민유방본은 무려 174번 검색되는데 〈세종실록〉에서만도 이 말은 14번 노출된다.)
 세종은 이전까지 2품 이상의 신임 수령만 친히 접견해오던 관례를 깨고 모든 수령을 직접 만나 애절한 당부의 말을 하고는 했다.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綬)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백성에게 친근한 관원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黜陟)하는 법을 거듭 단속하였는데도, 오히려 듣고 보는 바가 미치지 못함이 있을까 염려된다...관리는 깨우쳐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관가의 일을 문란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이 적발하여 아뢰는 기풍이 없음으로써, 또한 원통하고 억울한 처지를 면하게 하여, 전리(田里)로 하여금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영구히 끊어져서 각기 생생하는 즐거움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세종 5년 7월 3일)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삼봉은 맹자의 ‘폭군방벌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왕에게 잘못이 있을 때 갈아치울 수 있다는 논리로서 군주 도중 퇴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치철학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세종은 군주 퇴임뿐 아니라 아예 군주의 부임 자체가 백성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정치철학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1431년 세종 13년 6월 20일 경연에서 세종이 한 발언은 가히 혁명적이다. 이 자리에서 세종은 찬성 허조와 논쟁을 벌인다. 허조는 수령을 백성이 고소하는 것을 국가가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세종은 반대의 뜻을 표한다.
- 임금이 찬성 허조에게 이르기를, “근간에 들으니, 경이 대언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부민들이 친히 수령을 고소하는 자는 마땅히 수리하기를 허락치 말라고 하여, 내게 상달되기를 바란다. ’고 하니, 경이 일찍이 말하기를, ‘부민이 수령을 고소하는 것은 심히 충후(忠厚)한 풍습이 아니라’고 하여, 태종(太宗)께서도 가납(嘉納)하셨으니 경자년에 이미 법을 세웠는데, 내가 일찍이 생각하건대, 자기의 억울한 바에 이르러서도 다 수리하지 못하게 한다면, 가령 수령이 백성의 노비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다시 수리하지 않는 것이 가할까?” -
세종의 어조는 완곡한 것 같지만(‘경의 말이 매우 옳으나’), 백성이 수렁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여 고소했을 때 국가는 마땅히 이를 수리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한 신념으로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이 다음에 이어지는 발언이다.
“민생들이 하고자 함이 있는데 임금이 없으면 어지러워지므로 반드시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하였는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받지 않으면 어찌 다스리는 체통에 해롭지 않을까.”
이것은 ‘백성이 필요에 의해서 임금을 세웠다’는 이른바 군주추대론이 아닌가? 세종은 본래부터 군주의 성립 자체가 백성의 권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근대 직전 유럽 영국에서 제기된 사회계약설을 알고 있다. 사회계약설은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장자크 루소 등에 의해서 제기된 혁명적인 정치사상으로서 최소한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자연 상태는 투쟁의 상태로서,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계약을 맺고 모든 권리를 지배자에게 양도함으로써 국가가 성립하며, 따라서 왕권은 신성하다.”(홉스)
“인간의 자연 상태는 자연법이 지배하는 평등한 상태이며, 인간은 재산과 생명, 그리고 자유라는 자연권을 누리고 있었다. 인간은 자연권을 더 확실히 누리기 위하여 계약을 맺고 국가를 형성하였다.”(로크)
“인간은 자유롭고 국가의 성립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므로 일반 의지의 행사인 주권은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루소)
위 셋은 모두 17~18세기의 사람이다. 물론 세종은 이들처럼 정교한 이론으로 군주추대론을 설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른 시기 15세기 인물이었던 세종의 군주추대론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사회계약설이며 이들 세 사람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