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삼봉 정도전과 세종 이도는 만난 적이 있을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두 사람의 생몰연대는 삼봉이 1342년 - 1398년, 세종이 1397년 - 1450년이다. 삼봉이 죽었을 때 세종의 나이는 겨우 두 살, 결국 태종 이방원은 삼봉을 죽인 이전 해에 셋째 아들 세종 이도를 낳은 셈이 된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일단 태종은 삼봉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지만 삼봉이 입안한 정책 중에서 좋은 것들을 받아들여 시행했다. 사병 혁파라든지 활자 진흥책 등이 그런 것이었다. 반면에 태종은 삼봉의 핵심적인 통치철학 중 하나인 군신협의제는 철저히 배격하여 의정부서사제를 폐하고 6조직계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태종의 아들 세종은 달랐다. 세종 시기 삼봉은 내내 역적으로 규정되고 금기시됐던 인물이다. 그랬음에도 세종은 부왕의 통치철학보다 오히려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삼봉의 통치철학을 선택했다.

세종은 태종이 폐했던 의정부서사제를 부활하여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재상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니까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본다’는 말은 세종에게 더 들어맞는다. 물론 태종의 시기가 이른바 창업기였다면 세종의 시기는 수성기였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우리는 요즈음에도 ‘삼족을 멸한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소설 ‘삼국지’라든지 우리나라 텔레비전 사극 같은 데에 많이 나온다. 실제로 중국 역사에는 삼족을 멸한 사례가 있었다. 우리는 조선시대에도 역모를 범했을 경우 대부분 삼족을 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설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삼족이란 대체로 아버지 - 본인 - 자식 3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로 조사해 보면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삼족을 멸한다는 말은 불과 네 번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삼족을 멸하는 법에 대하여 연산군이 긍정적으로 말했던 적은 있다.

“옛날에는 삼족(三族)을 멸하는 법이 있었으니 만약 이런 법을 쓴다면 한 집안의 형제나 숙질이 서로 경계하여 형이 착하지 못하면 아우가 책하고, 아저씨가 착하지 못하면 조카가 경계하여, 이렇게 서로가 힘쓰게 되면 풍속이 거의 바로잡아지게 되리라. 이런 뜻으로 글을 지어 대중을 타이르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10년 8월 7일)

여기에서 연산군의 말 ‘옛날에는 삼족을 멸하는 법이 있었으니’는 오히려 당대에는 이 법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조선 건국부터 연산군 때까지 삼족을 멸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연산군 이후에도 실제로 이것이 합법화된 사례가 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단 한 차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서 여적죄를 지은 이계(李烓)에게 청의 요구대로 청나라 법에 의거하여 삼족을 멸하라는 인조의 전교가 내린 적이 있기는 하다. 이 밖의 기록은 ‘정조실록’과 ‘순조실록’에 한 차례씩 더 나오는데 오히려 삼족을 멸하는 법 자체가 없었음을 입증한다.

“우리나라가 비록 삼족을 멸하는 법은 없으나 결국은 반드시 극형을 가해 없애버려야 마땅하다.”(정조실록 23년 7월 10일)

“오직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세우심이 인후(仁厚)하여 삼족을 멸하는 한(漢)나라의 법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역적을 다스리는 율은 또한 분수(分數)를 두었습니다.”(순조실록 15년 11월 15일)

삼봉 정도전의 아들 정진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진은 역적의 아들이다. 그러나 태종은 정진에게 벌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보호해 주었다. 나아가 세종은 정진을 형조판서로까지 중용했다. 이처럼 역적의 아들 정진은 76세로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군주들의 보호를 받았다.
내가 보기에 조선역사를 왜곡하는 주범은 텔레비전 사극과 흥행 영화이다. 이런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식민사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과거의 저작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문재인 씨는 영화 ‘광해’를 보고나서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영화 ‘광해’는 실제 광해군의 모습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왜곡된 영화였다. 광해군은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기득권에 도전하다가 희생된 군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지도층이나 지식인이라고 해서 일반 대중보다 지적 수준이나 독서 수준이 조금도 나을 게 없는 매우 특이한 사회다. 조선시대에 삼족을 멸했다고? 단언하거니와 그런 일 없었다.

조선을 과대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왜 좋은 것은 감추고 나쁜 것은 부풀리면서 있지도 않았던 더 나쁜 것을 일반화하여 말하는가? 우리는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직계 조상 조선인을 언제까지나 비하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