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이 세상 모든 악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이것은 태종이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틈나는 대로 일렀던 말이다. 우리가 알듯이 조선은 15세기에 이른바 ‘때 이른 절정’에 도달했다. 이것이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 이도(재위 1418~1450)의 공헌이라는 데에는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세종은 실로 성군이었다. 하지만 부왕 태종이 없었더라면 이 위대한 성군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역사를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태종을 골육상쟁을 자행한 무도한 살인자로 알고 있다. 물론 그는 형제들을 죽이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처남들과 사돈(세종의 장인)까지 죽였다. 오늘의 관점에서 그의 살인행위들은 변호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대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그의 살인행위들은 범죄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통치행위였다고 보아야 한다.
세계 역사를 볼 때 태종 이상의 무리수를 범하고도 명군으로 추앙되는 군주는 허다하다. 그런데 유독 태종에 대한 평가만 혹독한 것은 가능한 한 조선의 역사를 비하하려는 식민사관의 영향 탓이다.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가 최초로 기술한 우리 민족의 통사는 조선을 이롭게 만든 인물은 폄하하는 반면 조선에 비판적이었거나 조선을 부정한 인물을 부각시키는 변칙을 자행했다.
그들이 조작한 역사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이방원을 비하하는 대신 조선 건국세력에게 제거된 최영을 한껏 드높였다. 조선 중후기 유독 실학자들이 부각된 것도 정통성리학을 반사적으로 폄하하려는 의도가 관철된 것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유달리 다산 정약용이 부각되어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정약용은 실학자 중에서도 조선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는 정약용을 흠모했던 개화 역적 김옥균을 제1호로 복권시켰다.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태종 이방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수렴될 수 있다. 도올 김용옥 같은 이는 삼봉 정도전과 태종 이방원 양자에게 공히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영우 교수는 삼봉 정도전의 진가를 최초로 세상에 알렸지만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을 결코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태종 이방원만큼 냉철한 지도력을 보여준 군주는 거의 없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당면한 안팎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이 절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도력의 특징은 중요한 고비마다 쾌도난마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112쪽)
나는 태종이 가장 냉철한 지도력을 보인 지도자라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고독한 군주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태종은 자기 자신이 장자의 정통성이 없었기에 장자 양녕을 어떻게 해서든 후계자로 만들어 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다. 게다가 왕위를 장자로 상속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환란을 자기 자신에 비추어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양녕은 군주의 그릇이 아니었다. 덩치가 큰 양녕은 키 작은 아버지에게 위협적으로 대들기도 했다. 그래서 태종은 고육지책으로 양녕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아볼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양녕을 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녕을 폐한 날 그는 밤새 대성통곡을 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후 그는 셋째 아들 충녕을 왕세자로 삼아 지극정성을 다하여 후계자 훈련을 시켰다.
“이 세상 모든 악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이런 말은 아무 아버지나 또는 아무 군주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종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태종은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가 유리하든 불리하든, 또는 자기에게 주어진 그 어떤 권력일지라도 한 틈의 누락도 없이 공적인 가치로 전환시킬 줄 알았던 비범한 군주였다.
무엇보다도 태종이 비범했던 것은 자신의 생전보다도 사후를 더욱 중시한 역사전향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역사를 흥밋거리로 아는 호사가들은 태종 이방원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흔히 태종을 박정희와 비교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해서 어불성설이다. 박정희는 일단 공적인 가치와 사적인 욕망을 혼동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사후를 고려할 만한 지적 교양과 희생정신이 전무했다. 박정희가 죽자 그의 유신체제는 무너져 내렸지만 태종 이방원이 죽자 조선은 위대한 문명을 꽃 피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