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정치학자 최상용 교수(고려대 정외과)는 삼봉 정도전을 가리켜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 마키라벨리가 말하는 ‘덕성’, 막스 베버가 말하는 ‘책임윤리’, 이 세 가지 미덕을 겸비했으며 단테나 마키아벨리를 넘어서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1) 그는 본시 정치가란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력의 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냈느냐에 따라 평가가 이루어지므로 학자나 예술가처럼 무조건 호의적인 평가를 얻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타당하고도 현실적인 지적인 것 같다. 우리가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정몽주나 조광조는 학자로서의 정몽주, 학자로서의 조광조이지 정치가로서의 정몽주, 정치가로서의 조광조가 아니다. 막상 정몽주나 조광조를 정치가의 기준으로 평가해 들어가면 적지 않은 약점과 실책이 노출된다.

모름지기 ‘위대한 정치가’라는 말은 일단 정치권력을 얻어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정치권력을 얻을 때의 수단이 헌신적 삶의 방식이어야 하며, 이렇게 해서 얻은 정치권력을 공적인 가치로 전환시킬 때 그는 위대한 정치가로 거듭날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삼봉 정도전은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될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김용옥 교수는, 마르크스를 과학적 이론의 상징이요, 레닌을 혁명적 실천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분명 삼봉 정도전은 마르크스의 냉정과 레닌의 열정을 한 가슴에 품고 산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2

무엇이 이토록 삼봉을 높이 평가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앞에서 정치학자 최상용 교수는 삼봉을 정치가로 규정했지만 나는 삼봉을 혁명가로 규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삼봉의 전 생애는 물론 그의 이념과 철학 등이 모두 일관되게 혁명을 추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삼봉은 고려 말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고서도 정치보다는 혁명을 추구했고 조선 건국 후 만인지상의 재상 자리에 올랐을 때에도 역시 정치보다는 혁명을 실천하려 했다. 나는 삼봉이 이루고자 했던 정치는 철저한 민본정치였으며 그가 해내고자 했던 토지개혁은 오늘날의 토지 국유제에 가까운 혁명적 발상이었음을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어서 우리는 삼봉이 선택한 권력체제와 그가 추구한 ‘사상혁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삼봉이 추구했던 권력체제는 한 마디로 해서 오늘의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것이었다.

모든 권력체제는 권력의 집중과 분산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날 데모크라시 국가에서 선택하는 대표적 권력체제인 대통령제와 내각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권력의 집중과 분산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데모크라시는 민(民)이 주인이 되는 체제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민의 자치와 민의 자결을 선거라는 방식을 통해 이루려고 시도한다. 반면에 입헌주의란 역사적으로 볼 때 왕권의 제약과 관련되는 개념이다.

삼봉은 왕권을 제약하는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매우 구체적으로 입안했다. 물론 삼봉의 모든 혁명적 아이디어의 바탕에는 성리학적인 윤리의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삼봉이 생각한 윤리는 일차적으로 지배계층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뛰어난 진보성을 읽을 수 있다.

삼봉은 왕권을 효율적으로 제약하기 위해서는 사대부가 먼저 자기들의 도덕적 규범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일반 백성 역시 사대부의 윤리를 규제해야 진정한 민본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민의’ 또는 ‘민심’의 개념이 도출된다. 삼봉에 의하면 민심은 천심 그 자체인데 이를 제대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도 일정한 수준의 문화적 환경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아직도 서구인이 만든 근대 개념에 얽매여 있는 진보주의자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에게는 ‘근대가 없었다’는 무거하고 무용한 콤플렉스로 인해 삼봉을 ‘전근대’의 틀에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삼봉은 근대도 아니고 전근대도 아닌 인물이다. 따라서 조선보다 대한민국이 근대적이라는 주장이나 대한민국보다 조선이 전근대적이었다는 주장 역시 허무맹랑한 낭설에 불과하다.

아직도 이성계를 박정희나 전두환에 빗대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이것은 통탄해야 할 일이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식민사관의 핵심은 조선 건국의 폄하에 있다. 조선 건국을 폄하해야 조선을 망국시킨 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봉의 혁명적 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특수한 문제의식의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우리는 ‘근대’나 ‘봉건’ 따위의 진부하고 저의가 있는 언어에서 탈출하여 삼봉 시대의 문제의식과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나는 역사적 인물 중에서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과 공유될 수 있는 것을 많이 남긴 인물일수록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삼봉만큼 위대한 혁명가는 우리 역사에 없었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1) 최상용, 「정치가 정도전 연구」, 서울, 『아세아 연구』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2003년, 제46권 1호 1~29쪽
 2)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서울, 통나무, 2004년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