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젊어서 혁명을 꿈꾸어 본 사람은 많다. 비교적 온화한 편에 속하는 정치인 손학규도 젊은 시절 혁명의 야심에 사로잡혀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전 입사 시험을 봤는데 당시 노조를 장악해 서울시의 불을 다 끄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1)
하지만 이런 정도의 생각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혁명을 관념만으로 꿈꿔본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다. 거기에는 치기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수준의 문제이다. 거기에는 ‘목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숨을 내놓고 혁명을 실천에 옮긴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혁명에 성공한 사람은 0.01%도 되지 않는다.
삼봉 정도전이 부모 3년상을 치르면서 『맹자』를 읽을 때에만 해도 혁명의 꿈은 관념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훗날 이 꿈을 실천에 옮겼다. 그렇다면 정도전으로 하여금 혁명의 꿈을 실천에 옮기도록 한 요인이 무엇이었을까?
3년상을 마친 삼봉은 1369년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때를 기다렸다. 2년 후인 1371년 마침내 공민왕이 국정을 농단하던 신돈을 처치하고 대대적인 성균관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성균관은 삼봉의 스승인 이색, 동문인 정몽주, 이숭인 등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삼봉은 이들의 천거로 성균박사가 된다.
그러나 1374년 9월 공민왕이 시해를 당하고 이어서 우왕이 즉위하자 이인임, 경복흥 등의 권문귀족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들은 친원파였다. 마침 북원에서 고려와 연합하여 신흥 제국 명을 치자는 제안을 가지고 사신이 오게 되었다.
이인임 등의 친원파 대신들은 평소 껄끄럽게 생각해 오던 친명파 중에서 직급이 낮은 삼봉을 만만하게 여겼다. 당시 삼봉은 정7급이었다. 그들은 삼봉에게 북원 사신을 영접하라는 명을 내렸다. 삼봉은 진퇴양난의 위기를 맞았다. 사신을 영접하면 지금까지의 명분을 저버리는 것이고 사신 영접을 거부하면 어명을 어기는 것이 되어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딜레마의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삼봉이 보인 정면승부 방식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는 귄신 경복흥에 집에 제발로 찾아가서 원 사신 영접이 국익에 득인지 해인지를 추궁한 후,
“알겠소. 가리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원 사신의 목을 베어 올 것이오. 아니면 원 사신을 체포하여 명으로 압송하겠소.”2)
삼봉이 보인 날카로운 반발은 친원파 권문대신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같은 친명세력이면서도 직급이 높은 정몽주, 이숭인 등은 소극적인 반대를 표명한 데 비해 삼봉의 반대는 실로 도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친명파는 일시적으로 몰락한다. 그런데 정몽주, 이숭인 등은 2년 정도의 유배형에 그치고 정계에 복귀한 반면 삼봉에게는 장장 9년의 혹독한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봉은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 소재동으로 유배를 떠났다. 삼봉의 혁명의 꿈이 관념에서 실천으로 발효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유배지에서였다. 그렇다면 삼봉으로 하여금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실로 중대한 안건이다.
삼봉은 유배지에서 농민은 물론 천민들과도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결과 그는 민중들의 선량함을 목격했으며 그들이 의외로 지혜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그는 끈 떨어진 자기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는 동문 지식인들의 위선과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체감했다. 바로 이 점이 정몽주, 이숭인 등의 개혁파와 다른 혁명가 삼봉의 진면목이었다. 그는 철저히 백성(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삶을 실천했던 것이다.(계속)
1) 2011년 9월 16일 민주당 확대간부회의 발언
2) <태조실록>, 조유식 저 『정도전을 위한 변명』 서울, 휴마니스트, 2014년. 111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