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혁명은 ‘폭설이 내리는 새벽’과 같다는 말이 있다. 참 그럴듯한 수사법이다. 폭설이란 난데없이 몰아치는 것이다. 또한 폭설에는 시련과 고난, 폭력과 위력 등의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새벽이란 어떤 것인가? 새벽이란 어둠과 밝음 어간에 홀로 깨어 있는 시간이다. 또한 새벽 다음에는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온다.
삼봉 정도전은 어째서 혁명을 기획했을까? 순수하지 않은 인간은 혁명을 꿈꾸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순수한 인간이 혁명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정도전은 순수했기에 혁명을 꿈꾸었고 순수하지 않았기에 혁명에 성공한 것이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500년 민본왕조를 개창한 주역 삼봉은 원대한 국가 이념의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한양의 대궐과 전각 그리고 거리의 이름은 모두 삼봉의 작품이다. 요동정벌 문제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견제 당하고 사병혁파 문제 등으로 이방원과 갈등하던 그는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삼봉의 아버지 정운경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리학자였다. 그는 지방 출신이지만 개경에 올라와 관리로서 성취했다. 삼봉은 이런 아버지로부터 선비정신과 함께 약간의 재물도 물려받았다. 하지만 어머니 쪽이 문제였다. 삼봉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신의 혈통과 관련하여 세상의 시달림을 받은 인물이었다,1)
정적들은 삼봉을 가리켜, “가풍이 부정하고 계통이 밝지 못하다”2)며 그의 집안 배경을 들먹거렸다. 고려 말 중이 있었는데 그는 종의 아내를 빼앗아 딸을 낳았다. 이 딸의 딸이 삼봉의 어머니라는 것이었다.3) 요컨대 삼봉의 외할머니가 문제였다.
어쨌든 삼봉은 혈통 따위로 타인의 약점을 삼아 공격하는 무리들에게 경멸감과 함께 일말의 피해의식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혈통이란 본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면 혈통이 비정상인 사람 중에 위대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사실 공자나 예수도 사생아거나 아니면 사생아에 준하는 출생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삼봉은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등과 함께 수학했다. 19세(공민왕 9년, 1360년)에 성균시,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삼봉의 초기 관직 생활은 비교적 순탄했다. 하지만 그는 공민왕이 중 신돈을 우대하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표표히 관직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 버렸다. 당시 그는 25세, 여전히 젊은이였다.
낙향 이듬해 부모가 연달아 타계하여 여막에서 3년 상을 치르던 삼봉은 학우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를 읽는다. 그는 맹자를 하루 반 장 또는 한 장씩만 읽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안광지배철(眼光紙背徹, 눈빛이 책의 종이를 뚫는다)’의 무서운 정독이었다.
삼봉은 『맹자』의 무엇에 그토록 매료된 것이었을까? ‘왕은 국가의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하므로 백성은 왕의 하늘이다’라는 민본지상주의였을까? 아니면 ’나는 왕에게 충성하지 않고 의(義)에 충성한다‘는 첨예한 정의주의였을까? 둘 다였을 것이다, 그는 이런 것 말고도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라는 적나라한 위민후생정신도 『맹자』에서 함께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도 삼봉의 눈에는 ‘폭군은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으니 죽여도 된다‘는 폭군방벌론이 더 확연했을 것 같다. 이처럼 혁명이란 모반의 살인은 정당하다는 비순수가 함께 하지 않고는 애초부터 실현불가능한 것이다.(계속)

1) 한영우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서울, 지식산업사, 2014년, 10쪽
2) 『고려사』에 있는 기록인데 신동준의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서울, 살림출판사, 2007년, 26쪽에서 재인용했다.
3) 『태조실록』 8년, 신동준 앞의 책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