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정축(1457)년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에서 경산(京山)을 거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에 잠겼다.” 하더니,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만 아니라,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훨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문장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천지군친)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 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
위 글은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앞부분이다. 참고로 조의제문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읽을 때에 조, 의제, 문으로 끊어 읽어야 뜻이 잘 통한다.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회왕 손심)를 죽인 배신자 항우를 비난하고는 의제에 대한 각별한 추모의 정을 표시했다.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자.
- 내 충성된 마음은 쇠와 돌도 뚫을 만큼 굳세기에 회왕이 지금 홀연히 내 꿈에 나타났다. 주자의 원숙한 필법을 따라 떨리는 마음을 공손히 가라앉히며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제사하노니,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
조의제문이 조선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글이 된 이유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운 역사에서는, 이 글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의제는 단종을, 의제를 죽인 항우는 세조를 비유한 것으로 해석했고, 지금도 이런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문하생 김일손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는데, 이것을 간신 이극돈과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알리어 분노를 격발시켜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김종직 계열의 학자들이 처벌되었고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었다.
물론 당시로서 단종을 추모하고 세조를 비난한다는 것은 왕조의 법통을 부정하는 불온한 행위로서 용서 받지 못할 죄에 해당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김종직은 역사의 희생자가 되었고 사림파의 영수 격으로 부상했다.
조선시대 사화를 훈구파 대 사림파의 이원적 대립으로 단순화시킨 기존의 해석이 가진 문제점은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이 글에서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과연 세조를 비난하고 단종을 추모하기 위해 쓴 글인지, 그리고 김종직은 사림파의 영수로 우대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 두 가지만을 논의하고자 한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쓴 것은 1457년(세조 3년)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다.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는 선산에 은거한 길재(吉再, 1353~1419)에게 성리학을 배우면서, 정몽주 - 길재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종직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사림파의 학문적 전통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종직은 은거의 길 대신 출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조의제문을 지은 2년 후인 세조 5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의 저작, 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문장력 좋은 선비 10명을 선발하여 예문(藝文)을 겸하게 했을 때 뽑히기도 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김종직은 수찬(修撰) 직을 거쳐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지방 관직을 자원, 함양군수(咸陽郡守)로 부임했다. 그는 관내의 정자에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의 시가 걸린 것을 보고는 “그 따위 자광(子光)이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하면서 즉시 거두어서 불태우도록 했다. 이 사건은 27년 후인 1498년 무오사화를 주모한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복수를 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 김종직은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승문원 참교(參校)가 되었지만 다시 지방 직을 자원하여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 함양군수와 선산부사 등 영남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김종직은 1482년에 왕명(성종)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다. 이후 성종의 신임 속에 승진을 거듭하여 홍문관 응교,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1485년 55세로 이조참판으로 있던 중 재혼했는데, 그때 부인의 나이 18세였다.
1487년 전라도관찰사, 1488년 공조참판을 지냈고, 1489년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으로 사직하고 밀양 옛집으로 돌아갔다가 1492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참고로 연산군이 즉위한 것은 1494년이니 그는 연산군 집권 2년 전에 죽은 것이다.
여기서 김종직의 일생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한 이유는 그가 철저한 현실참여자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김종직처럼 적극적으로 관직을 추구한 인물도 드물 것이며, 김종직만큼 순탄한 관운을 누리다가 제명에 죽은 관리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면 그의 세조 때 출사와 이후 거듭되는 출세는 모순이 된다. 물론 사람은 수많은 자기모순을 숨기거나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던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 이런 삶을 살았다면 이는 다른 문제가 된다. 이것은 훼절이거나 오욕에 가까운 삶이 된다는 것이다.(민음조선총서 01, 197쪽) 동시에 이런 사실은 김종직이 지조를 생명으로 삼는 영남 사림파의 영수였다는 평가에도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조의제문은 세조의 권력 찬탈을 비난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그는 단지 고사의 인물 의제를 추모했을 따름이다. 이 글에 대해 당시 대사간 강귀손이 남긴 발언을 들어보자.
“처음 찬집자의 국문을 청하자고 발의할 때에, 신은 말하기를 ‘그 글 뜻이 진실로 해득하기 어려우니,...종직의 문집은 신의 집에도 역시 있사온데, 신은 일찍이 보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5일 기사 중에서)
사실 당시의 관료들과 김종직의 지인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난한 글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결국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난한 글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연산군과 이극돈, 유자광 등이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무오사화 주동자들의 판단을 기정사실인 양 가르치는 역사를 배웠을까? 또한 왜 우리는 사림파라고 하면 무조건 정의롭고 지조 있는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들에게 분명하게 이어져 온 계보가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일까?
일단 정확한 역사, 통시적인 역사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 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식민사관은 조선의 주도세력은 무조건 ‘팥쥐’요, 주도세력에게 당하거나 저항한 세력은 무조건 ‘콩쥐’라는, 일명 ‘콩쥐 - 팥쥐’의 선악 2분법으로 조선역사를 기술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