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역사에서 비슷한 유형의 인물을 찾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시간과 공간은 다를지라도 비슷한 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분명히 있다. 이미 나는 당 태종 이세민과 조선 태종 이방원, 명 황제 영락제와 조선 국왕 세조의 삶을 비교해 본 바가 있다. 이 글에서는 15세기 조선의 인물 한명회와 비슷한 자취를 남긴 인물 하나를 골라 비교해 보려 한다.
한명회(1415~1487)가 조선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그가 <조선왕조실록>에 2,300번이나 언급되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알 수가 있다. 왕을 제외하고 따질 때 그는 우암 송시열(약 3,000번)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우리는 한명회가 당대에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책을 찾아보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명회라는 역사적 인물이 오늘의 현실 역사에 견줄 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지식을 습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교훈을 얻으려 함에 있다. 이럴 때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 중에서 공유되는 부분이 많은 인물을 찾아 비교 고찰해 보는 방법은 의외로 능률적일 수가 있다.
그렇다면 15세기 조선의 인물 한명회와 비교될 수 있는 현대인이 있다면 누구일까? 나는 김종필이 아닐까 한다.
한명회는 태종 때에 태어나 계유정난이라는 이름의 쿠데타에 주역으로 참여하여 세조 - 예종 - 성종 등 3개 왕정에 걸쳐 무려 34년 동안이나 2인자 권력을 누린 정치인이었다. 김종필은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 참여하여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세 정권에서 2인자 권력을 누렸다.
한명회는 3대에 걸쳐 판서는 물론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냈고, 김종필은 약 40년 동안 9선 의원과 두 번의 국무총리를 지냈다. 두 사람은 최고 권력자와 혼인으로 얽혔다는 점도 비슷하다.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이었고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다.
1415년생인 한명회는 1453년 쿠데타 이전까지 볼품없는 삶을 살다가 30대 중반에야 음서제 혜택으로 종9품직을 얻어 지내다 계유정난에 가담했고, 1926년생인 김종필 역시 볼품없는 삶을 살다가 어렵사리 6개월짜리 연수 수준의 육사를 졸업한 후 35세 때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에 가담했다. 다시 말해서 한명회는 종9품에서 국가권력의 2인자로 뛰어올랐고 김종필은 육군 중령에서 일약 국가권력의 2인자가 된 것이다.
한명회는 “내가 수양대군을 도와 거사를 성공시켰다”고 했고, 김종필은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한명회는 성종의 견제를 받아 일정 부분 권력을 잃었고 김종필은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권력 현장에서 밀려난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가시적 이력들보다는 본질적인 인성 면에서 두 사람에게는 더욱 닮은 것이 있다. 김종필은 1980년 5월 18일 새벽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보안사에 체포, 감금되었다. 5월 18일 아침 신군부는 관제보도를 통해 김종필 등 10여 명을 유신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했다.
김종필이 신군부에 의해 모욕적인 감금을 당하고 있을 때 당시 수경사령관 노태우 소장이 김종필이 감금된 지하감옥을 방문한 일이 있다. 노태우는 김종필에게 존댓말을 쓰며 깍듯이 예우했다고 한다. 이에 김종필은 노태우에게 2인자 처세술을 가르쳐주었다.
김종필은 이승만, 박정희 시절 2인자들의 몰락과 최후를 상기시키며, 절대 1인자에게 밉보이지 말 것, 1인자가 서운하게 하더라도 결코 서운하다는 말은 물론 기색조차 드러내서는 안 되며, 만약 서운함을 드러냈을 경우 주변에서 즉시 이간질하는 세력이 나타나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점 등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일화를 통해 김종필이 어떤 인격체인지를 단번에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명회는 어떠했을까? <조선왕조실록> 1487년 11월 14일 자에는 '한명회 졸기'가 담겨 있다.
실록에 의하면 ‘한명회는 젊어서 유학을 업(業)으로 삼아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냈고 세조의 대업에 제1공로자가 되어 10년 사이에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고 권세가 매우 성하여, 추부(趨附)하는 자가 많았고, 빈객이 문(門)에 가득하였으나, 응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일시의 재상들이 그 문(門)에서 많이 나왔지만 중국 사신에게 아부를 잘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2인자는 1인자가 될 수 있을까? 뜬금없는 말 같지만, ‘한번 해병이면 영원히 해병’이란 말이 있다. 또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에는 “한 번 갈보면 영원히 갈보다”라는 말도 있다. 나는 해병과 갈보는 잘 모르겠고 ‘한번 2인자면 영원히 2인자’라는 말은 믿는 편이다. 2인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한명회와 김종필은 지도자가 아니라 ‘영원한 책사’였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