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어명이오!” 우리가 텔레비전 사극 같은 데에서 자주 접하는 장면이다. 어명이오! 우리는 이 말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실제 우리는 텔레비전 사극 같은 데에서, 어명이오!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일거에 무색해지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정말 조선시대 왕이 내리는 명령, 즉 ‘어명’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을까? 물론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명에 하자가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어명에 명분이나 정당성이 부족 또는 결여되었을 때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과도 직결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이에 대한 다소의 오해가 있다. 우리가 아는 조선 왕권의 성격은 서양인들이 규정해 놓은 것과 거의 일치한다. 서양인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왕권을 절대적인 전제왕권이라고 지레 짐작해 버렸다.(이들 중 유명인으로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가 있다.)
앞서 글에서 소개했듯이, 최부(崔溥, 1454~1504)는 조선시대의 문신으로서 1487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중 풍랑으로 중국 저장성 닝보우에 표류해 갔다가 반년 만에 한양에 돌아와 왕명을 받고 <표해록(漂海錄)>을 썼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중국 강남 지방(양자강 이남)을 여행한 이는 거의 없었다. 사신이 가더라도 중국 북부에 위치한 북경에 머물다가 귀국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부는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내지 않고 일행 43명 전원을 인솔하여 귀환시키는 데 탁월한 지도력과 솔선수범을 발휘했다. 왕이 최부를 가상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학구적인 왕은 중국 강남땅을 알고 싶었다.
“최부는 쓸 만한 사람인데 만리를 표박하였다가 아무 탈 없이 생환하였다. 기억이란 오래 남지 않는 법이니 즉시 일기를 서찬케 하라.”
어명을 받은 최부는 청파역에 머물며 <표해록>을 집필한다. 매일 써 놓은 일기와 세심한 견문 기록 덕분에 집필 작업은 순조로웠다. 그는 서둘러 8일 만에 찬집을 끝냈다. 어명도 어명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향 집에 갈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부를 서용하는 일은 마땅히 상을 마친 후에 하겠지만, 우선 쌀과 콩 약간과 필요한 물품을 내려주도록 하라.”
고향에 간 최부는 어머니와 아내와 아우를 만났다. 그는 지체 없이 아버지의 무덤에 여막을 지었다. 며칠 후 전라도 관찰사가 목공들을 보냈다. 최부가 중국에서 보고 왔다는 수차 때문이었다. 최부는 목공들에게 수차의 설계도면을 그려주고 현장 지휘를 하여 40일 만에 수차를 완성해낸다. 그는 수차의 제조 방법과 용도 및 설치법까지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듬해 11월 또 최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직 복귀가 거론된 것은 어머니의 상까지 치른 후였다. 성종은 최부에게 정5품 사헌부 지평 직을 주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는 서경제가 있었다. 이것은 왕이 주요 관리를 임명한 후 사간원의 심사를 받는 제도로서 이른바 왕권을 견제하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간원에서 최부의 관직 복귀에 동의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이 사간원에 조회하자, 사간원 정언 조형이 와서 아뢰었다.
“최부가 귀환 후 일기를 지으라는 하명이 있었다 할지라도 마땅히 사정을 말하여 어미에게 갔다 온 후 하겠다고 했으면 임금께서도 반드시 응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통하는 마음이 없이 한양에 머물렀으니 이를 논박하느라 서경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알고 싶어 일기를 짓게 한 것이며 최부는 명을 받아 마지못해 응했을 따름인데 어찌하여 사간원에서 이런 논의를 한다는 말이냐?”
이틀 후 사헌부 장령 양변이 와서 아뢰었다.
“최부는 그 직위에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 사간원의 일치된 의견입니다.”
“내가 중국 강남땅에 대해 알고자 하여 시킨 것이니라.”
“비록 임금의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마땅히 추후에 짓겠다고 사양하고 아비 상사에 달려갔어야 옳았습니다.”
“아무리 상중이라 하더라도 어찌 군명을 어긴다는 말이냐?”
사간원에서는 다시 이틀 후 정언 이계명을 보낸다.
“최부가 초상 중에 있었으니 마음이 다급했어야 할 터인즉, 비록 성상의 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평안히 일기를 찬술한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조신이 만나러 가면 영접하지 않음이 없었고, 보고 겪은 것을 두루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애통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 득죄함이 큽니다. 이런 사람에게 지평의 임무를 줄 수 있겠습니까?”
“애통해 하지 않아서 일기를 지어 바친 것은 아니니라. 다만 조신을 영접한 것은 내가 알지 못한 바였다. 이제 사간들이 옳지 않다고 하므로 나는 내 뜻을 바꾸겠노라.”
이처럼 아무리 군왕이라 할지라도 법제화되어 있는 제도를 한사코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은 일단 사간원의 권한을 인정해 주기로 한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최부를 비호하는 것이 최부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왕은 최부에게 자신의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왕은 몸소 최부가 있는 선정전으로 가서 최부를 인견했다.
우리가 아는 “어명이오”와는 천양지차로 다르지 않은가? 나중에 최부는 관직에 복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의 민주적인 찬반 토론과 다양한 방식의 숙의가 있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