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오해의 소지가 있어 미리 밝히자면, 나는 서양에서 이식돼 온 데모크라시를 ‘민주주의’라고 여기지 않는다. 데모크라시는 사실상 내각제 또는 대통령제라는 특수한 형태의 정부구성방식을 취하는 특정 제도에 불과한 반면,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民)이 주인’이 되는 이상적 개념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개념의 데모크라시를 실현한 국가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들인데, 그들은 대내적으로는 데모크라시를 지향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전혀 민주주의답지 않은 침략주의 노선을 취해왔다. 특히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와 결탁하게 된 데모크라시는 ‘민이 주인’이기는커녕 오히려 소수 특권층의 이익만을 비호하는 파행을 보이고 있다.
나는 현대 데모크라시의 최대 약점으로 ‘공론을 생산하기 어려운 구조적 취약성’을 들고자 한다. 누구나 부정할 수 없듯이 현대사회에 여론은 있을지언정 공론이 없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하의 데모크라시는 여론마저 왜곡, 조작하기가 아주 용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여론을 생산하는 주체는 매스미디어이다. 그런데 모든 매스미디어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집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매스미디어는 기업집단의 생존을 위해 강한 세력과의 담합, 다수 대중과의 영합을 끝없이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매스미디어를 무작정 ‘언론’이라고 호칭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이는 마치 데모크라시를 무작정 민주주의라고 호칭하는 것처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언론이란 ‘공론을 생산하는 주체’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론이 아닌 여론을 만드는(사실은 여론에 편승하는) 기업을 언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조선역사에서 여론이 아닌 공론을 생산한 모범사례를 삼사(三司)에서 찾는다. 삼사란 우리가 알듯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세 관서를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세 관서가 나름의 고유한 업무 분야가 따로 있긴 했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업무는 ‘간쟁과 탄핵’에 있었다. 삼사라는 포괄적 이름이 부여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며, 실제로 삼사의 구성원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며 함께 국정에 임했다.
삼사가 본격적으로 부상하고 제도적으로 정립된 것은 성종 중반 무렵부터였다. 수렴청정을 벗어난 성종이 건강한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신들에게 편중된 권력과 기득권을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대신이라 함은 세조 이래 양산된 수많은 공신들과 수렴청정 시기 원상정치에 참여한 재상 그룹을 말한다.
성종이 보기에 대신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급격히 보수화되고 있었다. 1475년 성종 7년, 약관 20세의 군왕은 칼을 빼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책문을 구하는 형식으로 세상에 대고 물었다.
“예로부터 정치를 잘한 자는 인재를 잘 알아서 옳게 선임한 데에 불과하였다. 옛날 월(越)나라의 범려(范蠡)는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월나라를 떠났고, 오자서(吳子胥)는 부차(夫差)에게 간(諫)하였으나, 부차가 듣지 않았는데도 떠나지 않았다가 끝내는 그의 화를 입게 되었다.”
여기에서 범려는 중국 전국시대 월왕 구천을 섬기며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큰 공을 세우고도 월나라를 떠나 다른 가치 있는 삶을 도모했지만, 오자서는 오왕 합려를 도와 강대국으로 만들고 남아 있다가 주변의 모함으로 죽은 인물이다.
이렇게 중국의 역사를 회고한 성종은 한층 노골적인 질문을 던진다.
“떠나서는 안 되는데 떠나는 것과, 당연히 떠나야 하는데도 떠나지 않는 것은 그 진퇴·출처의 동기에 있어서 어느 것이 옳으며 어느 것이 잘못인가?”
이 문제가 유도하는 답안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제 아무리 공을 이루었어도 범려처럼 떠날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자서처럼 남아 있다가는 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들어 있었다.
이어 성종은 덧붙이기를,
“나는 덕도 없이 외람되게 이제까지 7년 동안이나 신민의 주인 노릇을 하면서 밤낮으로 조심하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현량(賢良)한 준재를 등용하지 못하여 변방 지역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훌륭한 인재를 다 등용하지 못하고, 적당한 장소를 채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여러 선비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여 시무(時務)를 알 것이니, 소신껏 대답하라. 내가 직접 열람하고 선용(選用)하겠다."
이것은 자기가 수렴청정 7년 동안 얼마나 조신했는지를 밝힘과 아울러 앞으로는 새로운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할 것임을 예고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성종은 젊은 인재들을 대거 채용했고 그들을 삼사에 포진시켜 우수한 대간(臺諫)으로 양성해냈다.
대간들은 품계는 낮았지만 젊고 가진 게 없었으므로 거침없이 간쟁과 탄핵을 벌였다. 결과 대신들의 힘은 현저히 위축되었다. 심지어 대신들은 대간들의 탄핵이 두려워 몸을 사릴 정도가 되었다. 4년 후인 1479년, 성종의 발언을 들어 보자.
“지난번 정사를 볼 적에 자리에 있던 대신(大臣)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나의 고문(顧問)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는데, 한 사람도 응하는 이가 없었으니, 대신(大臣)의 체모(體貌)에 어떻겠는가? 내가 매우 섭섭하였다. 내가 그때에 즉시 추국(推鞫)하려고 했지마는, 그러나 대신(大臣)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는 까닭으로 과연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신하는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인데, 어찌 대간(臺諫)을 두려워하겠는가?”(성종실록 1479년 12월 17일자)
이렇게 됨으로써 국정은 왕과 승정원의 최종결정권력, 의정부와 6조의 정무행정권력 그리고 삼사로 통칭된 언론사법권력으로 정립(鼎立)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식으로 권력간의 견제와 균형을 추구한 것으로 ‘조선의 삼권분립’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신은 왕의 팔과 다리요, 삼사는 왕의 귀와 눈이라는 말이 달리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삼사의 기능은 1485년 완성된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위상과 지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 정의된 삼사의 기본 임무는 ‘간쟁과 탄핵’이었으며 그들은 엄청난 양의 공론을 생산함으로써 국가 존속의 기본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