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1493년의 일이다. 성종은 대간의 탄핵을 받은 재상 윤필상의 사직을 만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을 받은 홍문관원 유호인은 왕명이 부당하다고 여겨 거부한다. 이에 성종이 왕명을 거부한 유호인을 국문하려고 들자 동료 시강관 성세명이 왕에게 가서 따졌다.
성종 : “신하가 되어서 임금의 명령에 따르지 아니하는 것이 의리에 편안하겠는가? 일이 사직(社稷)에 관계되지 아니하는데 어찌 따르지 않아야 할 이치가 있겠는가?”
성세명 : “신하의 도(道)는 의(義)를 따르고 임금을 따르지 아니합니다.”
- 이상 <성종실록> 24년(1493년) 10월 27일 자 발췌
성종 24년, 1493년이면 조선왕조가 개창한 후 딱 100년에서 1년이 더 지난 시점이다. 우리는 위 군신간의 대화에서, 아니, 신하의 당돌하고 발칙해 보이는 대답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핵심 하나를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은 조선왕조가 왜 518년이나 장수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힌트이다.
세조의 장남으로 19세에 요사한 의경세자의 차남인 성종은 13세에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형식상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지만 당시 권력은 성종의 장인 한명회를 대표로 하는 승정원의 훈구 원상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성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재위 7년 때의 일이다.
성종은 원상들의 비대해진 권력을 견제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대간들을 키웠다. 대간은 처음에는 사헌부와 사간원 2사였다가 후에 홍문관이 가세하여 3사로 자리 잡는다. 그들의 주임무는 감찰과 언론이었다. 삼사는 성종의 지원을 받아 급속히 권력의 한 축으로 올라섰다. 그리하여 국가권력은 ‘왕 - 대신 - 삼사’ 3자 구도로 정립하게 되었다.
위에 있듯이 새파란 시강관이 재위 24년 차인 왕의 면전에서 ‘신하의 도는 의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삼사의 권력이 날카로워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말을 한 시강관 성세명이나 이전에 왕명을 거부한 홍문관원 유호인에게는 차후 어떠한 불이익도 가해지지 않았다.
삼사의 강점은 실력과 도덕성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젊은 관리들로서 높은 성리학적 도덕성을 추구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따로 ‘청요직(淸要職)’이라고 불렀다. 청요직은 국왕과 대신들에 대한 간쟁과 탄핵을 주저 없이 펼쳤다.
여기서 잠깐, 삼사의 권력 부상 원인을 지나치게 ‘성종의 대신 견제’에만 초점을 맞춰 해석하는 것(기존의 사관, 이덕일 유)은 곤란하다. 물론 그런 측면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종이라는 인격체 자체가 대단히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호학 군주였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당시 표류 끝에 중국에 간 최부의 <표해록>에는, 최부가 중국 관리들 앞에서 조선 군왕 성종을 자랑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성종이 하루 세번은 일상적이고 네 번이나 경연에 참가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의 관리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내심 감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튼 이런 성종의 노력은 이제까지의 수직적 권력구조를 수평적 권력구조로 변화시켰다. 삼사는 자체로 내부 자율적인 인선 방식을 구축하면서, 서경(署經, 임명동의권), 피혐(被嫌, 직무정지권) 등을 적절히 활용했다. 특히 <홍문록>은 대단히 선진화된 제도적 장치였다. 홍문록이란 홍문관에서 작정한 자체적인 인선 명부를 말하는데, 당시의 인사는 이 홍문록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요즘으로 치면 고도의 인사 시스템을 갖춘 셈이었다.
삼사의 부상은 놀라운 일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조선사 연구에서 간과되거나 오해되는 것이 바로 이 삼사의 역할이다. 기존의 연구들은 삼사를 사람(士林)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 중기의 역사를 단순한 ‘훈구 대 사람의 권력 투쟁사’로 전락시킨다.
“사화를 출신배경이 다른 훈구파-사람파 단순 선악대립구도의 이분법으로 봐서는 안 된다. 조선사회는 혈통과 가문 등이 공고하게 짜여진,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사회였다. 사림파 거두로 알려진 조광조나 김종직도 명문거족 출신이었고 훈구파 거두 양성지와 후손들은 사림파로 분류될 수도 있다. 훈구와 사림은 서로 얽혀 있었다.”(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조선이 개국하고 100년이 지난 후 ‘성종-연산군-중종’의 ‘3대-75년’에 바로 조선왕조 장수의 비결이 있다. 우리가 알듯이 이 시대는 ‘사화와 반정의 시대’였다.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를 이른바 ‘흑역사’로만 간주해왔다. 식민사관이 그렇고 텔레비전 사극들이 죄다 그랬다.
조선왕조 500년을 관통한 헌법과 강상인 <경국대전>이 완성된 것은 개국 94년째인 1485년이었다. 제도란 구비되기도 어렵지만 정착되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다. 특히 진보적이고 선진화된 제도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화와 반정을 훈구 대 사림의 권력투쟁이나 폭군의 난행 정도로만 치부해서는 결코 올바른 조선사관을 가질 수가 없다. 네 번의 사화와 두 번의 반정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중에서 최소 세 번의 사화와 한 번의 반정은 진보적이고 선진화된 헌법과 강상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했던 희생이었다. 아주 상투적인 말이 하나 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