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최근 김범(37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저술한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는 조선시대의 사화(士禍)에 대해 대단히 합리적으로 말하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사화라고 하면 치정이 얽힌 궁중 암투극이거나 훈구-사림 간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일단 이런 관점은 고루하고 상투적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여러분이 동의하건 말건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것이며, 요즘의 흥행영화나 텔레비전 사극 등과도 비슷한 것이다.
김범은 이 책에서 ‘삼사의 언론활동 규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이야말로 조선시대 500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키워드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의 책 <사화와 반정의 시대>의 핵심 주제가 바로 “삼사라는 중요한 관서가 그 기능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과 결과를 살피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김범 <한겨레> 인터뷰)
한편 <민음 한국사>에서는 ‘삼사’ 대신 ‘청요직 연대’라는 용어를 쓰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이 더 사실에 온전히 부합한다.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9대 성종(재위, 1469~1494), 10대 연산군(1494~1506)과 11대 중종(1506~1544)까지의 75년 시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기간에 세 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첫 번째 반정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김범은, “조선시대를 임진난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경우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진통 끝에 국왕-대신-삼사의 정립구도가 자리 잡은 건국 1백여 년 뒤의 이 3대 75년 간의 치세가 조선후기까지 관통하는 제도의 토대를 놓은 시기다.”라고 말한다.
사실 이런 관점은 최근 들어 식민사관에 영향 받지 않은 신진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공유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물론 사화와 반정에는 조선 역사의 음습한 그늘, 즉 부정적인 면이 적잖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역사에서 사화와 반정은 절대적,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상당 부분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화와 반정은 하나의 진보적인 제도가 아무리 권위적으로 문서화됐다고 하더라도(경국대전) 그것이 현실적으로 착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격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용한 역사적 소재가 된다. 사화와 반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앞서 김범이 지적했듯이, 조선이 중기와 후기를 이어가며 장구한 세월 동안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비결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청요직 연대의 부상은 조선의 기존 15세기 식의 권력구조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변화를 야기했다. 청요직 연대에 의해서 기존의 권력서열인 왕-대신-중하급관리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따라 국왕과 대신이 자기들의 위상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청요직 연대가 실력과 명분을 바탕으로 확보하게 된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
- 소위 사화로 불리는 잇단 정치적 소요로 점철되는 16세기는 아같이 격화된 갈등 구도 속에 그 서막을 열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16세기 초반의 두 임금인 연산군과 중종은 도덕적 권위에 대한 부담감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던 왕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성종의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겪는 부담이 성종대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같은 딜레마에 처해 있었다. 즉 청요직 연대가 정치 운영의 기초로 자리 잡게 된 상황에서, 도덕적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국왕의 권위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
- 민음 한국사, 조선 02, 40쪽
연산군은 청요직들에 의해 군주의 권력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즉위했다. 게다가 청요직들이 보기에 연산군은 전임 성종에 비해 학문적 역량이 현저히 부족했다. <성종실록>에는 세자의 학습 부진을 걱정하면서 이모저모로 대책을 강구하는 성종의 언급이 여려 차례 나온다.
“세자의 나이가 지금 17세이나 문리(文理)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이를 근심하고 있다. 이 뒤로는 서연관이 3일에 한 차례씩 강론토록 할 것이므로 은미(隱微)한 말이나 오묘(奧妙)한 뜻도 정세(精細)하게 풀지 않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절목(節目)을 상량(商量)하고 논의하여 아뢰도록 하라."(성종실록 23년 1월 19일 자 기사, 1492년)
이런 연산군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나온(?) 군주였다. 왜냐하면 성종 다음 연산 초기의 청요직들은 부족한 연산군과는 정반대로 최강의 실력으로 무장된 강경파들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왕과 사의 대립은 첨예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연산군은 자질이 조금 부족했을지언정 처음부터 폭군의 면모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권위를 갖출 능력이 없는 군주는 권위 있는 타자에게 의존하여 자기의 권위를 지키려고 하는 법이다. 연산의 롤모델은 호학의 아버지 성종이 아니었다. 불행히도 그의 롤모델은 반란자 할아버지 세조였다. 그리고 이것은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부언] 16세기 당시 세조를 비판하는 것은 절대금기사항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세조의 쿠데타를 쿠데타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박근혜의 롤모델은 아버지 박정희인 것 같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기의 권위를 지킨다. 게다가 박근혜 주변의 그 누구도 5.16을 쿠데타라고 말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