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遺臭萬年)’이라는 말이 있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꽃향기는 백세까지 가지만 더러운 악취는 만년까지 간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꽃향기는 선인을, 악취는 악인을 비유한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선인과 악인이 공존한다. 당연히 우리는 선인을 따라 배우고 악인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선인을 알아보기는 쉽지만 악인을 알아보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무언가 피치 못한 개인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악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악만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악인도 경우에 따라 선을 행하며, 이로써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유취만년의 주인공 유자광(柳子光, 1439~1512)에 대해 논의하려 한다. 유자광은 약 500년 전에 살다 간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행적을 통해 오늘의 여러 인물들과 만날 수가 있다.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며 유자광과 비슷한 현대의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지 각자 생각해 보기 바란다.
유자광은 조선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요약하면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조선 역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1) 유자광은 부윤 유규의 서자인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나빠 도박으로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까지 길에서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 강간하곤 했다. (남곤, 유자광전)
2) 유자광은 남원에서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재기가 넘쳤다. 깎아 세운 듯한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시를 짓게 하자, 즉시 “뿌리는 땅속에 기반을 두고 형세는 삼한을 누르네”라는 시를 지었다. 아버지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훗날 그가 크게 성취할 것을 알았다.(유몽인, 어우야담)
위에서 보듯, 같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거의 상반되지만 두 글의 공통점을 추려 보면 유자광은 체력과 정신력 양면에서 비범한 축에 드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유자광의 첫 관직은 갑사였다. ‘으뜸가는 군사’라는 그 의미대로 갑사는 국왕 호위와 수도 경비를 맡는 정예병이었다. 당연히 갑사는 무예를 갖춰야 했으며, 용모와 체격도 뛰어나야 했다.
먼저 유자광이 어떻게 출세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자. 세조 13년(1467) ‘이시애(李施愛) 난’ 이 일어났을 때 그는 남원으로 내려가 근무 중이었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그는 즉시 도성으로 달려 올라와 상소를 올린다.
“식사를 하다가 수저와 젓가락을 버리고 올라왔습니다... 갑사에 소속된 뒤 항상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 한번 죽으려고 했습니다... 함길도가 험하지만 그런 조건은 적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미천하더라도 한 구석에서 싸워 조속히 이시애의 머리를 베어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자광의 상소는 세조를 감동시켰다. 세조는, “이 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하다. 참으로 기특한 재목이니 곧 임용해 그의 옳은 뜻을 시행하겠다.”라고 말했다. 서자로 태어나 하급장교로 지내던 유자광의 삶은 이 일을 계기로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유자광은 세조 앞에서 자신의 무예를 선보였다. 그는 몇 계단을 한 번에 뛰어넘고 큰 기둥을 원숭이처럼 올랐다. 세조는 유자광을 겸사복(兼司僕, 종9품)에 임명했다. 유자광은 즉시 반란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석 달 후 이시애 난은 진압되었다.
세조는 유자광을 병조좌랑(정5품)으로 승진시켰다. 병조좌랑은 이조정랑과 함께 삼사와 대등하게 하급 관직의 임명에 동의할 수 있는 권한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자대권)을 가진 요직이었다. 실록에는 서얼이 육조 낭관에 임명된 것은 유자광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재위 마지막 해 세조는 온천욕을 하려고 온양으로 행차했는데 유자광은 총통장(總筒將)으로 수행했다. 유자광은 행차를 기념한 별시에 응시했는데, 문과 초시의 대책(對策) 답안에서 탈락했다. 세조는 시험 책임자 신숙주에게 물었다.
“유자광의 답안이 좋은 것 같은데 어째서 합격시키지 않았는가?” 
“고어(古語)만 사용한 데다 문법도 소홀해 합격시키지 않았습니다.”
“고어를 썼더라도 묻는 본의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괜찮지 않은가?”
세조는 유자광을 1등으로 올리고 즉시 병조참지(兵曹參知, 정3품)에 제수했다. 이것은 실록에 ‘조정이 다 놀라워했다’라고 쓰였을 정도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유자광은 상소를 올려 세조를 감동시킨 지 단 8개월 만에 하급무관 갑사에서 정3품 당상관에 오른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고변이라고 하면 ‘일러 바친다’는 뜻을 갖는 말인데, 바로 이 고변이야말로 유자광의 특기였다. (대학 도서관 자료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유자광 - 고발은 나의 힘’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검색된다.)
유자광은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새로운 왕에게 신임을 얻고자 고변을 감행했다. 그것이 유명한 ‘남이(南怡, 1441~1468)의 모반’이다. 그는 남이가 한명회, 김국광 등의 대신들을 죽이고 임금을 갈려 한다고 고변했고, 이로 인해 남이는 가혹하게 처형되었다. 유자광의 조정 내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유자광의 두 번째 고변은 조선의 역사 중에서 추문에 속하는 사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유자광은 55세였다. 유자광은 위험한 치세를 무사히 넘겼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유자광은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사초로 비롯된 사건에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악의적으로 풀이하여 연산군에게 바침으로써 사화를 격화시켰다. 거기에는 함양 학사루(學士樓)에 걸린 자신의 시판을 김종직이 떼어내 버린 과거사로 인한 개인적 감정도 개입했을 것이다. 우리가 알듯이 김종직은 무오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되었다.
폭정을 자행하던 연산군은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 유자광이 반정에 적극 가담한 것은 특유의 형세판단력 때문이었다. 이 일로 유자광은 정국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천하의 모사 유자광에게도 몰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연산군 때 두 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젊은 대간들은 유자광을 탄핵했고 그것은 두 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대간들은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시켰다. 그러나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고, 갑자사화도 그가 주모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했다.
결국 유자광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고 병을 얻어 눈이 먼 그는 5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73년, 오욕의 인생이었다. 그는 오늘날 조선사 연구에서 악인의 대명사처럼 취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