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유학의 절대가치라고 하는 충과 효, 어느 것이 더 중요했을까? 어감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충과 효’를 요즘 말로 바꾸면 ‘사회윤리와 개인윤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람은 사회윤리와 개인윤리가 조화를 이루어야 정상이며, 이로써 온전한 역사의식을 가질 수가 있다.
최부의 <표해록>에는 중국 관리와 최부 사이에 충과 효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하루는 공술서를 받으러 온 중국 관리 설민이 최부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고향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나중에 드러나지만 이것은 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유도성 질문이었다.
“이미 말한 대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내가 익사했다고 여기고 계실 테니, 마음으로 통곡하지 않고는 고향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하가 된 자는 나라를 생각할 뿐 집은 잊어야 합니다. 당신은 나라 일을 하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왔으므로 나라를 더 생각해야지 어찌 집만을 생각합니까?”
이에 최부는 설민의 주장에 반대를 표한다.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소이다. 효도를 다하지 못하면서 충성한 자는 아직 없습니다.”
“당신 나라 임금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시의 임금 성종의 이름은 이혈이다. 하지만 최부는 중국 관리의 유도질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신하 된 자가 어찌 임금의 이름을 다른 사람과 가벼이 말할 수 있겠소?”
“나라 밖으로 나와 있으니 거리낄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나는 어디에 있든지 조선의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최부는 효를 우선시했지만 충에 대해서도 결코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얼마 후 최부가 북경에 도착하자, 중국 관리들 사이에서 그동안 최부가 보인 의기와 학식에 관해 칭찬이 자자해졌다. 명나라 예부에서는 최부가 일행 43명 전원을 안전하게 지휘 인솔해 온 공로를 인정하여 황제 표창을 건의했다.
먼저 포상이 있은 후 다음에 황제 사은이 있을 거라고 했다. 최부는 포상 자리에는 배리 정보를 보내기로 했다. 상 받을 때 아랫사람을 보낸 것은 조선 선비의 높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당시 최부는 30대 초반 나이에 정6품의 조선 관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조선 선비들의 높은 자존심이 읽힌다.
최부는 정보에게, 첫째 예를 최대한 지킬 것, 둘째 위엄을 잃지 말 것, 셋째 부당한 요구에는 바로 응하지 말 것 등의 지침을 주어 보냈다.
상품은 예상보다 많았고 조선인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최부에게는 모시옷과 붉은 비단을 두른 지팡이, 홍록색 비단으로 만든 습자(문구), 청색 비단으로 만든 답호(패물), 가죽신과 털버선 그리고 녹면포 한 필이 내려졌다. 그리고 일행 전원에게도 상하의 한 벌씩과 옹혜(신발) 한 켤레씩이 주어졌다.
문제는 다음 날 황제 사은 때 빚어졌다.
“내려 주신 풍성한 선물에 감사합니다. 다만 친상은 진실로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자식으로서 상중에 화려한 길복을 입는다면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나 또한 사람의 자식인데 상복을 경솔히 벗음으로써 효가 아닌 명분을 찾기가 주저됩니다.”
최부는, 아무리 대국의 황제라고 해도 자기는 아버지 상중이니 상복을 벗기가 어렵다는 말로 중국 관리들을 당혹시킨 것이다.
“오호! 이 상황에서 친상보다 천은이 시급한데 숙배의 예를 그만둘 수는 없소이다. 틀림없이 하사 받은 옷을 입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관복을 갖추고 입궐하여 황제의 은혜에 사례하는 데 어긋남이 없도록 합시다.”
“상을 당하여 비단옷을 입고 사모를 쓰는 일이 한사코 내키지 않습니다.”
“당신이 빈소 곁에 있다면 아버지가 중하겠지만, 지금은 황제께 은혜를 입은 시점입니다.”
“어제 상을 받은 것은 나의 배리였으니 사은도 배리를 시키면 어떨까 합니다.”
“상을 받을 때는 배례 절차가 없었지만 사은에는 있으니 당연히 일행의 우두머리가 직접 절을 해야 합니다.”
중국 관리와 최부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최부는 상복을 벗지 않고 황궁으로 향했다. 다만 배리 정보 등으로 하여금 길복을 들고 따라나서도록 했다.
장안문 앞에 이르자 최부가 중국 예부 관리에게 말했다.
“감히 내 손으로 상복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 예부 관리는 근엄한 자세로 두 손을 올려 최부의 상관을 벗겼다. 그리고는 사모를 씌워주며 말했다.
“자고로 국가에는 기복의 제도(국가 비상시 상중에 있는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오.”
이렇게 하여 최부는 길복으로 갈아입고 황제 전에 입시 배례한 후 장안문 좌문으로 나왔다. 그는 지체 없이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걸어서 장안가를 지나 옥하관(사신 숙소)으로 돌아왔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이런 형식적인 절차들이 멋져 보인다.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가운데 융통하는 여유와 미덕이 옛사람들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다시 충과 효의 논점으로 돌아가 보자. 이 글의 앞에서 최부는 설민과 이른바 충효 논쟁을 벌였다. 중국의 설민은 충 우위론, 조선의 최부는 충효 동질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최부는 충이란 효를 의제화한 가치이므로 효 없이는 충도 없다고 했다.
우리는 조선시대 효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실천의 과격성(?) 때문에 놀랄 때가 있다. 심청의 공양미 삼백 석을 들지 않더라도 조선 사람들이 과격하게 효를 실천한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어째서 그들은 효를 그토록 절대시했을지 오늘의 우리로서는 이해가 난감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 시대적, 공동체적 가치관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조선시대 당대에는 효가 도덕적 수준을 넘어 일종의 로맨티시즘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시 말해 효는 가장 멋진 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멋진 일에는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근대에 들어 효 대신 연애(불륜 포함)가 로맨티시즘이 되었다. 그러자 효는 리얼리즘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더욱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효뿐 아니라 연애마저 리얼리즘으로 타락해 버렸다. 우리 시대의 로맨티시즘은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