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국가 권력이 폭력을 행사할 때에는 으레 사건의 발단이 되는 빌미와 겉으로 내세우는 명목이 있다. 미욱한 사람들은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이를 탓하거나(흔히 말하는 빌미론), 권력이 내세우는 명목을 믿으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어느 사건이든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탐구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갑자사화의 빌미는 이세좌 사건과 홍귀달 사건이며, 명목은 ‘왕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저지른 능상의 척결’이었다. 기존의 역사연구와 역사소설들은 하나같이 이 빌미와 명목에만 치중하는 역사 인식을 공유해 왔다. 그러나 이런 역사 인식은 일단 비본질적인 인식일 뿐더러, 조선 역사를 졸렬한 인물들의 사감과 원한으로 인한 치정 복수극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언제나 빌미는 일상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다. 이세좌 사건은 연산 9년 9월 1일 인정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예조판서 이세좌가 국왕이 내린 술잔을 엎질러 어의를 적신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이세좌는 졸지에 불경죄인이 되어 유배형을 받았다.
이로부터 반 년 후인 연산 10년 3월, 국왕은 참봉 홍언국의 딸을 탐내어 입궐시키라는 명을 내렸지만 심지가 굳은 홍언국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홍언국은 당시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의 아들이었다. 홍귀달이 연산에게 손녀가 병이 있어서 입궐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하자 연산은 “부자가 서로 구원한다”며 그들의 행위를 어의에 술을 쏟은 이세좌 사건처럼 능상으로 규정했다.
연산은 홍귀달을 유배 보내면서 차제에 능상의 풍조를 통렬히 일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자기 생모 윤씨가 성종에게 폐위, 사사됐을 때 성종 후궁이었던 귀인 정씨·엄씨와 그 아들들을 불러 사적인 폭행 린치를 가했다.
우리는 이 변태적인 사건의 경위를 살펴봄으로써 권력이 이성을 잃었을 때 나타내는 극단적 사례 하나를 실감할 수가 있다.
- 국왕은 모비 윤씨가 폐위, 사사된 까닭을 엄씨와 정씨가 참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밤에 그들을 대궐 뜰에 결박해 놓고 직접 마구 때리고 짓밟았다. 그리고는 (그들의 아들) 이항과 이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고 명했다. 이항은 어두워 누구인지 몰라서 때렸지만, 이봉은 어머니인 줄 알고 차마 때리지 못했다. 분노한 국왕은 사람을 시켜 마구 참혹하게 때려 결국 죽게 만들었다.
국왕은 검을 잡고 자순대비(성종비 정현왕후)의 침전 밖에 서서 노한 목소리로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고 연달아 외치면서 재촉했다. 시녀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대비는 나오지 않았지만 왕비 신씨가 따라와 힘써 구원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국왕은 내수사를 시켜 엄씨와 정씨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 버렸다. 
- 연산 10년 3.20 기사, 이범 저 <사화와 반정의 시대>에서 재인용
연산은 폐비사건에 개입된 모든 관원의 명단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명단에는 공교롭게도 이세좌와 홍귀달이 둘 다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서 고립된 국왕이 벌이는 광란의 숙청이 조정 바닥을 피로 물들이게 되었다.
갑자사화의 피화인은 최소 240명 이상이다. 이것도 하옥이나 파직은 포함되지 않고 사형과 유배의 숫자만 계산한 것이다. 이 중 절반이 문과 급제자였으며 사형만 96명이었다. 대신보다 청요직 희생자가 많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대신들의 피해가 더 치명적이었다. 빌미를 제공한 이세좌, 홍귀달은 물론 연산에 의해 ‘갑자 6간’으로 지목된 이가 모두 대신이었다. (이 점 역시 사화에서 ‘훈구’와 ‘사림’을 엄격히 분리한 통설에 문제가 많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갑자사화의 빌미와 명목이 무엇인지를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 빌미와 명목에 숨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국왕 연산의 역량 부족이나 그의 이상 성격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 국가권력이 저지른 대량 폭력의 주요인은 국왕의 ‘권력 독점 욕망’이 아니었을까? 연산은 그의 권력 독점화에 도전하는 자들을 온갖 빌미와 명목을 내세워 숙청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500년이 더 지난 2013년, 한국에서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빌미는 경기도 ‘당원교육회합’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명목은 ‘종북세력의 척결’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모두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이 사건의 본질적 이유는 ‘통일을 원치 않는 분단 고착화 세력의 권력 유지 욕망’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