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최근 유시민 씨가 한 방송에서 “(자기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식인은 유럽인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주제를 이토록 당연하다는 듯이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양주의(慕洋主義)’라는 말을 만들어서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모화주의(慕華主義)에 유추하여 만든 말이다. 조선시대에 중국을 터무니없이 우러러본 일부 유학자들처럼 지금 대한민국에는 서양을 터무니없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많다는 데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유시민 씨는 모양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라는 일본 작가가 있다. 그는 자기 서랍의 비밀번호는 ‘1789’라고 자랑처럼 말하는 일본인이다.(이렇게 공개하면서 그걸 비밀번호라고 하다니?) 아무튼 21세기의 일본인 작가가 왜 230년 전의 프랑스혁명을 동경하는지 나는 납득하지 못한다.
모양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조장한 집단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실증주의를 내세워 한국의 역사를 편년체로 나열함으로써 역사의 주체를 없애는 작업을 도맡았는데, 일본인에게 배운 이병도, 신석호 등의 사학자가 여기에 가담했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역사의 주체를 망각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일제식민사관의 악영향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깊고 넓다. 그들은 끊임없이 조선인을 폄하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삼국유사」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단연 우대를 받는다.
상당수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남자는 서구인이 되었다. 젊은 여성들은 조선의 여인이 남존여비 사회에서 지옥 생활이나 다름없이 살았다고 믿게 되어 명절이 닥치면 몸부터 아파진다는 이상한 증후군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일제 때부터였다. 페미니즘과 동성애 과시와 지나친 ‘개 사랑’ 등도 모양주의와 관련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식민지시대 민족계몽주의자들과 국가주의자들도 모양주의의 징후를 드러냈다. 그들은 애창곡으로 「메기의 추억」이나 「베사메무쵸」 등을 불렀고, 혹시 외국 대학에 가서 몇 달이라도 기숙사를 빌려 쓰다 오게 되면 ‘00대학교 교환교수’라는 해괴한 이력을 내세우게 된 것도 이 시대에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매사에 콤플렉스에 빠지다 보니 누가 자전거만 잘 타도 국가적인 일이었고, 비행기만 조종해도 동양 제패라고 과장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마라톤을 잘하면 아예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모든 것이 국위선양으로 통하는 국가주의 풍조는 일본 제국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이후로도 오래오래 지속되었다.
온갖 유용한 사료를 독점한 채 조선의 식민사관 만들기에 청춘을 걸었던 소장 조선인 사학자들은 대부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와 국사편찬위원회를 거의 장악했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 이병도는 서울대 대학원장과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더니 끝내는 문교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충무공훈장과 문화훈장 대한민국장과 무궁화 훈장을 받았다. 또 다른 수사관 신석호는 서울대학교 교수와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했다.
모양주의자는 일본인을 모방하여 영국의 명예혁명(사실은 영국 내전)이나 프랑스혁명(사실은 헤게모니 봉기)은 대단한 것으로 알지만 중국인민혁명이나 조선역성혁명은 나쁜 것인 줄 안다. 그들은 빛의 도시 광주에서 벌어진 5·18에 대해서도 일말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모양주의자 중에는 구미 유학파나 구미 학문 전공자가가 많다. 그들 중에는 실없이 유럽에 몇 년 다녀온 경우도 있다. 그리고는 ‘템즈강의 안개’가 그립다고 하거나 ‘하이델베르크의 빵’이 먹고 싶다는 등의 헛소리를 발설하기도 한다.
모양주의자는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은 너무 훌륭하다고 여기지만 조선의 종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모양주의자는 박근혜를 까고 싶으면 곧장 까도 되는데 굳이 메르켈과 비교하곤 했는데 이것은 박근혜를 까는 게 아니라 메르켈을 칭송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양주의자는 ‘르 몽드’나 ‘더 타임스’를 대단한 언론인 줄 안다. 그들에게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너무나 멋지지만 한국의 빨치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비적 수준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모양주의자가 대체로 간디, 테레사, 달라이라마 등을 존경하게 된 것도 기실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획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만든 인물인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체 게바라는 한없이 멋지지만 김일성은 박정희와 동격 수준으로 치부해 버리며 만델라가 김대중보다 한참이나 나은 인물인 줄 안다.
대한민국은 가치관이 전복되어 있는 나라다. 가치관이 전복되어 있으므로 역사가 왜곡되는 것이고 국민의식이 저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벌 집안이 명문가가 되었고 독립운동가 가문은 아예 ‘가문’으로 취급받지도 않게 되었다.
심지어 북을 무조건 나쁘게 보는 태도도 모양주의와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들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유럽의 마르크스 - 레닌은 지나치게 우대하는데 이것 역시 일정 부분 모양주의와 관련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문화적 병폐의 근저인 모양주의는 알고 보면 기실 일제식민사관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